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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국내 정착은 운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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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국내 정착은 운에 달렸다?

석원정의 '우리 안의 아시아' <46> 이 나라, 저 나라 떠도는 그들

언젠가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던 독실한 무슬림인 파키스탄인 바바의 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퇴직금 때문에 상담하러 온 것인데, 바바의 동생을 만난 김에 2003년도에 귀국한 바바가 본국에서 잘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바바는 그 사이 애기아빠가 되어 있었다. '부모님이 소개하는 아가씨와 결혼할 것이다, 무슬림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엄숙하게 말하던 바바는 그 말대로 부모님이 정해주신 아가씨와 결혼했고, 딸도 낳은 것이다. 그런데 그 아기가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수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의학을 전공하였던 바바는 파키스탄의 의학기술을 믿을 수 없었던지 아기를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한국에서 심장수술을 받겠다고 입국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생업이 있을 텐데 그것은 어쩌고 한국으로 오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산재를 당하면서까지 알뜰히 모은 돈으로 작은 사업체를 차렸다가 경기가 안 좋아서 문을 닫고 지금은 무직자로 한국에서 번 돈을 까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기의 심장수술을 위해 한국행을 준비한다니. 건강보험도 적용이 안 될 테니 아기 수술비도 엄청나게 들 것인데 수술비는 어찌 마련할 것이며, 수술은 어찌어찌한다 해도 앞으로는 일가족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지, 지레 내가 걱정이 되었다.
  
  유도선수로 위장하여 한국에 입국하였던 유네스라는 이란 청년은 2003년도에 불법체류자 단속때 걸려서 추방당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린 이주노동자들은 관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거쳐 경기도 화성에 있는 외국인보호소(외국인보호소는 경기도 화성-청주-여수에 있다)에 수용되면서 추방되기를 기다리는데, 그 사이 유네스는 내게 전화를 했었다.
  
  '선생님 저 잡혔어요...'라고 말하면서 '잘 지내시라'던 유네스의 귀국 후 생활이 궁금하여 유네스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유네스는 이란에서 잠시 있다가 다시 출국하여 이번에는 영국으로 갔다는 것이다. 나이도 찼고 결혼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떠돌아다니면 어떡하려는 것인지, 더구나 유네스는 한국어는 아주 빨리 정확하게 배워서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영어는 전혀 못했었는데 영국에서 별일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인지, 또 괜히 내가 근심이 되었다.
  
  몽골에서 아파트를 지어서 파는 한국인 건설업자에게 계약금-중도금 합쳐 1만 5000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내 집 마련의 꿈을 꾸었다가 건설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우리 단체를 찾아왔던 몽골여성 제기는,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분양건 마무리를 위해서 귀국하였었다.
  
  그러다가 1년여가 지나 제기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 대학교 법학과 학생이 되어. 제기는 법을 배워서 몽골로 돌아가 법과 관련된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400여만 원이나 되는 한 학기 등록금에, 생활비에, 책값이며 등을 다 어떻게 부담하려는 것인지, 본인 생각으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겠다는데 그게 잘 될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는 하지만 공부를 하는 것은 또 다른데 한국학생들과 어떻게 보조를 맞춰가면서 공부할 수 있을지 괜시리 내가 염려가 되었다.
  
  어떤 알제리 사람이 우리 단체를 찾아왔었다. 그 사람은 우리 단체가 이전에 있었던 지역의 파출소 순경의 도움으로 우리 단체를 찾아왔었는데, 7~8년 전에 사용하던 우리 단체의 명함을 보여주면서 우리 단체가 어디로 갔는지를 찾았다고 한다. 그가 내민 낡은 명함에는 우리 단체가 상담을 접수할 때 붙인 일련번호가 있었고, 그 일련번호로 지난 상담기록을 뒤져 그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당시 산재를 당하여 우리 단체에서 상담을 했었던 사람이었다. 한쪽 팔을 다쳤었는데 꽤 심한 부상이었는데 다행히 산재로 인정받아 치료비며 장애보상금 등을 모두 수령하였었다. 당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다 끝난 후 그는 귀국했는데, 본국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해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다시 이주노동자로 나섰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른 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한국을 방문한 김에 예전 명함을 들고 우리 단체를 찾아온 것이다. 찬찬히 보니 다친 그의 한쪽 팔은 전혀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런 팔로 어떻게 직장을 구할 것이며 어떻게 먹고 살려는지, 마음이 싸해지면서 마치 내가 부상을 입힌 듯이 미안해지고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껏 만난 이주노동자들 중 가장 권리의식이 투철하던 파키스탄인 알리가 갑자기 우리 단체를 찾아왔다. 본국에서 변호사로서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했었지만 월급여가 한국돈으로 20여만 원에 불과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그는, 우리 단체가 발간했던 여러 종류의 노동법 책자들을 스스로 공부해가면서 묻고 나중에는 파키스탄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치지도 않고, 얻어맞지도 않고, 5년간의 한국생활에서 두 번 임금이 체불되었지만 상담소의 도움으로 금방 해결되었던 '운 좋은 이주노동자' 중 한 사람인데, 돈도 웬만큼 벌었고 해서 귀국하였었다. 집에 간다고 인사차 찾아온 그와 악수를 하면서'잘 가시라'고 했었는데, 2년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파키스탄에서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벌이는 시원찮아서 이번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다시 이주노동을 하러 갔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택시운전을 하는데, '좋은 직업'이라고 흡족해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잠시 들르게 되었고 그 김에 우리 단체를 찾아온 것이다.
  
  본인이 한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생활에 만족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긴 했지만, 그가 이주노동을 마칠 때까지 계속 '운 좋은 이주노동자'가 될 수 있을지,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법조인으로서의 능력은 영영 사장되고 말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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