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평가원 측은 정답이 틀렸다고 인정하기보다 "고교 교육과정 테두리 안에서 답을 찾는다면, 평가원이 제시한 정답은 오답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반발을 사고 있다.
심지어 대한물리학회까지 나서서, "평가원이 제시한 정답은 틀렸다"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평가원은 기존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평가원이 제시한 정답은 '명백한 오답'
해당 문제는 1몰의 이상기체의 상태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를 제시한 뒤,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옳은 것을 고르는 것이다. 학생들은 다음 세 가지 설명 가운데 옳은 것을 모두 골라야 한다. (좌측 사진 참조)
"ㄱ. A→B에서 기체가 받은 열량은 RT이다.
ㄴ. B→C에서 기체가 외부에 한 일은 3/2RT이다.
ㄷ. C→A에서 기체는 외부로 열을 방출한다."
이상기체는 분자의 부피가 없고, 분자 간 상호작용이 없는 가상의 기체다. 물론 이런 기체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실제 기체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이상기체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태에서 이상기체의 부피가 줄면 열이 외부로 방출된다. 따라서 ㄷ.은 옳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정답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2번과 4번, 5번이다.
그런데 위 세 가지 설명 가운데 'ㄴ.'은 명백히 틀렸다.
과학자들은 이상기체를 단원자, 이원자, 삼원자 이상기체 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단원자 이상기체의 정적 몰비열은 3/2R, 이원자 이상기체의 정적 몰비열은 5/2R, 삼원자 이상기체의 정적 몰비열은 6/2R이다. 따라서 그래프의 'B→C' 과정, 즉 열이 차단된 채 이상기체의 부피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기체가 외부에 한 일은 단원자 이상기체일 경우에는 3/2RT이며, 이원자 이상기체의 경우라면 5/2RT, 삼원자 이상기체의 경우라면 6/2RT이 된다.
그런데 해당 문제는 '이상기체'라고만 명시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이상기체에 해당하는 설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ㄴ.'의 설명은 단원자 이상기체에만 해당하는 설명이므로 일반적인 이상기체의 성질이라 볼 수 없다.
그리고 'ㄱ.'의 설명은 어떤 종류의 이상기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ㄱ'도 틀렸다.
따라서 보기의 세 가지 설명 가운데 옳은 것은 'ㄷ.'뿐이다.
그러므로 정답은 2번이다. 하지만 평가원은 4번을 정답으로 제시했다. 평가원이 오답을 정답으로 제시한 셈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언론이 이번 사태를 '수능 오답 논란'이라고 보도했지만, 이 역시 부적절한 표현이다. '오답 논란'이 아니라 '(명백한) 오답'이다.
똑같은 문제에 대해 고3은 4번, 대학 1학년은 2번이 정답?…출제 실수가 낳은 혼란
그런데 해당 문제가 다룬 내용은 대학 신입생이 배우는 개론서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 1학년 학생이 이 문제를 푼다면, 당연히 2번을 정답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평가원의 주장대로라면, 똑같은 문제에 대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에서는 4번이라고 답하고 '대학에 입학한 직후 치르는 시험'에서는 2번이라고 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몹시 불합리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혼란이 빚어진 이유는 평가원 측이 문제를 잘못 출제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단원자 이상기체'라고 명시하거나, "이원자, 삼원자 이상기체의 경우는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단서를 달았다면 평가원의 주장처럼 4번이 정답이다.
이에 대한 평가원 측의 설명은 이렇다. "현행 고교 교육과정은 단원자 이상기체만 다루고 있다. 또 교과서 역시 단원자 이상기체에 대한 내용만 담고 있다. 따라서 고교 교육과정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는 학생이라면, 이상기체는 당연히 단원자 이상기체를 가리킨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4번을 정답으로 제시하는 게 옳다"라는 것.
그런데 이런 설명은 옹색하기도 하지만, 사실과도 다르다. 현행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는 검인정 방식이다. 국가가 단일한 종류를 발행하는 게 아니라 여러 출판사가 각기 다른 종류를 발행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교학사판 물리 교과서 등 일부 교과서는 다원자 이상기체(이원자, 삼원자 이상기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교과서에는 단원자 이상기체에 대한 내용만 담겨 있다. 하지만 일부 교과서는 그렇지 않으므로, "모든 고등학생이 이상기체에 대해 당연히 단원자 이상기체를 가리킨다고 받아들인다"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가원 측의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
대학 신입생이면 알 수 있는 오류…물리학자들의 지적에도 고집 안 꺾는 평가원
이처럼 평가원 측이 오류를 인정하지 않은 채,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자 한국물리학회가 입장을 냈다. 대학 신입생이면 파악할 수 있는 오류를 밝히기 위해 물리학자들이 직접 나선 셈이다.
한국물리학회는 2008학년도 수능 물리Ⅱ 11번 문제에 대해 "엄밀하게 따지면 2번이 정답이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2번과 4번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적어도 정답을 택했는데, 오답으로 처리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대부분의 교과서가 단원자 이상기체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문적으로 오답인 4번을 정답으로 고른 학생이 피해를 입는 상황이 생겨서도 안된다"라는 배려가 담긴 입장이기도 하다.
한국물리학회의 이런 입장 표명에도 평가원 측은 아직까지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평가원의 고집이 과학 지식을 왜곡하는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