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이 마침내 끝났다.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앞으로 4년간의 임기동안 선거운동기간에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고, 낙선된 후보는 유권자들의 심판에 겸허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후보뿐만 아니다. 총선 정국에 태풍의 눈이었던 시민사회단체들도 만족감에만 빠져있지 말고, 총선이 끝난 것을 기점으로 그간의 운동 방식과 내용에 대해 자체점검하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인물본위의 운동의 한계**
지난해말 정치인을 혐오할 정도로 불법정치자금과 측근비리 연루 정치인에 대한 기사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차떼기'란 신조어가 생길정도로 불법자금은 국민을 분노로 전율케 했다. 국민의 기성정치 혐오감은 서청원 등 부패연루 혐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부결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같은 국민의 분노속에서 '2004총선시민연대'와 '물갈이국민연대'가 "부패정치 일소"를 외치며 발족했다. 총선연대는 2월3일 발족 당시 발표한 선언문에서 "개혁에 반하는 구시대 정치인, 부패무능 정치인들을 정치현장에서 영구히 퇴출시키기 위한 낙천낙선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고, 물갈이연대 역시 "못참겠다 갈아보자, 이제는 물갈이다"란 구호가 상징하듯 부패정치 청산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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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은 발족 당시부터 시민사회의 단일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발족 당시 각종 토론회에서 낙선, 당선운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줄을 이었다.
서형원 녹색정치모임간사는 지난 1월27일 참여사회포럼에서 "두 운동(낙선, 당선운동)의 주된 잣대인 부패, 선거법 준수, 도덕성과 같은 기준은 구태를 청산할 기준이긴 하나 우리 정치가 지향할 가치를 모두 담은 것은 아니다"며 "이는 당장의 지지를 먹고사는 현실정치의 입장일 수는 있어도 대안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시민사회운동의 태도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도 "'인물교체 차원의 물갈이'로는 일시적인 대중적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지언정 의미있는 정치개혁으로 이어지는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며 인물본위의 운동을 비판했다.
총선연대와 물갈이연대도 이같은 비판을 일부 수용해 정당에 대한 평가, 인물뿐 아니라 정책에 대한 평가도 실시한다고 했지만, 각각의 운동 중심은 변화가 없었다.
***파병, FTA, 비정규직 문제... 총선연대-물갈이연대의 외면**
또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은 연초부터 이라크 파병논란, 한-칠레 FTA 협정체결 논란,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씨 분신 등의 비정규직 문제 폭발 등 각 정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연이어 터졌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 혹은 사건은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켰으나 기성정당들이 보인 행태는 국민 일반의 여론과는 어긋나면서, 정치권에 대한 배신감이 커진 상황이었다.
요컨대 일반 시민들은 부패비리정치인 청산뿐만 아니라 민의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정치인에 대한 심판까지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초 부패비리연루 여부, 도덕성, 선거법 준수 여부 등에 낙선-당선의 포커스를 맞춘 총선연대와 물갈이연대는 좀더 복잡해진 유권자의 요구를 수용하기 매우 곤혹스러워졌다. 예컨대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파병에 참여한 국회의원도 낙선대상자에 포함시키라"는 요구가 봇물을 이뤘지만, 총선연대와 물갈이연대는 이런 요구에 미적거릴 뿐이었다.
***앞서가는 유권자, 따라가지 못하는 시민사회단체**
그러던 중 3월12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탄핵역풍이 불자 시민사회단체는 기민하게 대응했다. 이들은 대통령 탄핵 사태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규정하며 신속히 '범국민행동'을 결성, 잠재된 국민적 분노를 외화시키는 빼어난'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15만이 넘는 대규모 촛불시위로 87년 6월항쟁을 연상시키는 한편의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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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때에도 이들은 '한계'를 드러냈다. 물론 불법시비를 거는 경찰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당시 자발적으로 참여한 다수의 시민들이 촛불의 광장을 단지 '탄핵무효'에 한정하는 것을 원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당시 비슷한 시기에 터져나온 '추가파병'문제에 대해 광장에서 폭넓은 주장과 담론을 기대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 예로 파병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연이어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민들 중에는 "왜 파병반대 피켓을 내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는 "파병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한 시민사회단체가 앞장서서 촛불 광장에서 파병반대 목소리를 제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우려는 총선연대가 낙선대상자 명단을 발표했을 때 현실화됐다. 탄핵소추가결에 참석한 의원 전원을 낙선대상자에 포함시킨 반면, '파병찬성의원' 문제는 외면했다. 그 결과 낙선대상자 명단을 받아든 유권자들이 보인 "이들이 낙선대상자인 것은 수용하지만, 파병에 찬성한 의원들에게는 왜 면죄부를 주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총선연대 지도급 인사는 "파병찬성의원까지 포함시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의원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냐"고 항변했으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유권자들은 총선연대에게 요구한 것은 그러한 '숫자놀음'이 아니라 정확한 가치판단기준 제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같은 한 단체가 물갈이연대에서는 동일한 후보를 '당선운동 대상'으로 선정하고,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에서는 '낙선운동 대상'으로 선정하는 이중성을 보여, 여론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원내진입으로 시민사회단체의 새로운 포지셔닝 필요**
총선결과만 두고 보면, 총선연대와 물갈이연대가 당초 목표로 했던 부패정치인 다수가 물갈이되며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낙선률' 혹은 '당선률' 만으로 이들 연대의 활동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 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는 "물갈이는 사실 총선연대와 물갈이연대의 활동 때문이라기보다는 유권자 스스로가 '해치웠다'"고 말했다. 부패비리, 선거법 위반같은 너무나도 명백한 도덕성 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은 이제 유권자 '스스로' 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시민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얘기다.
더욱이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입에 성공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들은 기존 시민사회단체들이 펴온 가치와 주장들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 지적이다. 90년대 시민사회단체들의 역할이 보수일색의 정치구조때문에 유의미했다면, 민주노동당이 입성하면서 시민사회단체는 새로운 '포지셔닝'을 요구받게 됐다는 것이다.
총선연대에서 활동한 한 활동가는 "16대 총선에서의 낙선운동은 분노의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호응을 받았지만, 17대 총선의 유권자 운동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누구나 말 할 수 있는 것'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였다"고 토로했다.
이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단체에게 90년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민사회단체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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