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 관련 내용을 공개한 김용철 변호사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의 도덕적 흠결을 지적하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보수 언론과 일부 경제신문이 주로 쏟아내는 보도다.
"양심은 선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런 보도가 남긴 질문은 이렇다. "도덕적 흠결이 있는 자가 사회적 비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은 신뢰할 수 없는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만이 거대자본이 저지른 비리를 고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철학자들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이들의 설명은 이렇다. "양심은 오직 선량한 인간만이 가지는 선한 인성의 발동이 아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그 어떤 계기를 통해, 그리고 스스로 올바르고 싶고 남들로부터 올바른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를 갖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공표하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을 수 있다."
'철학함'의 입장에서 사회적 발언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자율적으로 모여 합의된 의견을 발표하는 모임인 전국철학앙가주망네트워크(Philosophical Engagement Network, PEN)은 19일 "돈이 아닌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엄정한 특검수사를 촉구한다"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했다. (☞ 격문 전문 보기)
이날 격문은 호서대 김교빈 교수, 전남대 김상봉 교수 등 17명의 철학자들이 초고를 작성해 발의했으며, 210명의 철학자들이 검토하여 서명했다.
"'침묵의 카르텔' 고수하는 언론, 김용철이 파렴치범으로 각인되기만 기다린다"
PEN은 이날 격문에서 "그 동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우리의 직업인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 윤리 개념인 '양심'의 입장에서, 과연 우리 국가와 사회가 바로 이 양심을 알아보고 지원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비상한 관심으로 주시해 왔다"고 밝혔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에 담긴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을 향한 발언이다.
이어 PEN은 "지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경제적 독재권력이 중심에 놓인 이 사건을 두고 국가 기관, 각종 사회권력들, 특히 청와대와 여야 정당, 그리고 언론의 반응을 보면서 크게 절망한 끝에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들이 절망을 느낀 대목은 이렇다.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이라는 국가권력 담당자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삼성제국의 거대한 비리를 짚어낸 한 인간의 양심을 알아볼 그 어떤 의지도 없다"는 점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언론을 비롯한 이 사회의 각종 권력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면서, 김용철이라는 한 시민의 양심이 묻히고 그가 파렴치범으로 각인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처신을 보인다"라는 점이다.
신정아 사건 파헤치듯 삼성 비자금 조사한다면
그리고 PEN은 "과거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 원 비자금 사건은 당시 박계동 신한국당 의원이 제시한 예금 잔고 조회표 한 장으로 그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경우 A4 서너 장에 불과한 내부 실무자의 회계자료 제보 하나로 정몽구 회장의 구속까지 이르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사건들 모두 대검 중수부가 바로 수사에 착수했었다"라고 덧붙였다.
또 "올해 들어서는 한 고위공직자의 사소한 권력형 비리와 남녀 스캔들이 뒤얽힌 학력 관계 사문서위조사건을 갖고 유력한 사립대학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털어내다 급기야 쌍용그룹 전 회장이 집안에 은닉한 막대한 비자금까지 찾아냈다"라는 점도 지적했다.
과거 사소한 단서만으로도 사건의 실체를 포착했던 언론과 검찰이 유독 삼성의 비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한 지적이다.
"검찰, 삼성에 증거 인멸할 시간 주려는가"
이어 PEN은 "검찰과 경제계의 검찰격인 금융감독원은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이 생명과 인격을 걸고 제시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수사 착수는커녕 마치 범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입 맞출 시간을 갖게 할 요량인 양 계속 시간을 끌었었다"라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국가기관에 의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되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PEN은 대한변호사협회가 '의뢰인 비밀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며 김 변호사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나선 사실과 김 변호사를 비난하며 삼성 법무실장에서 물러난 이종왕 변호사를 지적하며, "우리 사회와 국가는 한 시민의 양심을 알아볼 능력도 없단 말인가"라고 개탄했다.
그렇다면 비리를 고발한 시민의 양심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PEN은 양심에 대한 설명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이들의 설명은 이렇다. "양심이란 자기 신념이나 사고 또는 행위가 옳다고 믿는 주관적 확신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 자기의 양심으로만 그 객관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사회나 국가의 정의도 '실천적 실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 개인이 양심을 걸고 나설 때 그 '진정성'을 알아채는 것은 그 사회나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능력 또는 국가 능력이다."
"김용철은 삼성의 공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은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김용철 씨는 지금 양심적 언행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이에 대해 PEN은 "김용철 변호사는 지금까지 착하고 올바른 인생만 산 인물이 아니다"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5공 살인정권의 수괴 전두환의 비자금을 기어이 찾아낸 특수부 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실토했듯이, 삼성제국 안에서 제국의 범죄를 진두지휘한 그 범죄의 '공범자'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주범'이었다"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김용철 씨가 범죄의 공범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을 신뢰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에 대해 PEN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PEN은 "지금 이 순간, 변호사이기 이전에 이 얼룩진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서서 제국의 비리를 외부에 알린 이 '평범한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라며 "철학적 분별력에 따르면 바로 이 순간 시민 김용철이야말로 양심의 절실함을 갈구하는 '양심적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런 판단에 대해 PEN이 밝힌 근거는 이렇다.
이익에 반하는 고백, 양심 진정성을 충족한다
첫째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에 우리 사회에 삼성의 연이은 비리를 낳는 부패 구조에 대한 유의미한 진실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PEN은 '양심 진정성'을 판별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인 '유의미성' 조건이 충족됐다고 설명했다.
둘째는 김 변호사는 자기 행위가 이익에 초연함을 보였다는 점이다. 김 변호사는 이제 더 이상 삼성으로부터 얻을 게 없고, 오히려 과거 얻었던 것조차 빼앗길 처지로 몰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PEN은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켰다"라며 '양심 진정성'을 판별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인 '이익 초연성' 조건이 충족됐다고 설명했다.
셋째는 김 변호사가 "언제든지 굽혀질 수 있는 자기 양심의 나약성에 대해 그는 스스로 저항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라는 점이다. 김 변호사가 수도원에 스스로를 가둔 것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PEN은 이날 격문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돌아가면 자기파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에다 스스로를 결박했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PEN은 '양심 진정성'을 판별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인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 조건이 충족됐다고 설명했다.
넷째는 김 변호사가 "비난과 비판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해명한다"는 점이다. PEN은 이날 격문에서 "무엇보다 그는 자기 양심의 진정성에 쏟아질 수 있는 모든 의혹과 비난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 시험대 위에 올랐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에게 어떤 비난도 해도 되고 어떤 의혹을 제기해도 된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PEN은 '양심 진정성'을 판별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인 '항상적 자기시험 용의' 조건이 충족됐다고 설명했다.
"삼성 후원금 받지 말고, 삼성 제품도 쓰지 말자"
이처럼 PEN은 김 변호사의 양심 고백에 담긴 진정성을 의심하는 주장을 논박한 뒤, 삼성 비리에 대한 특별검사제 도입, 김용철 변호사가 참석하는 국회 청문회 개최,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 임용 철회 등을 주장했다. 이어 PEN은 이번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모든 학술, 시민단체가 삼성의 후원금을 받지 않을 것과 함께 삼성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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