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광주민주항쟁을 그렸다 해도 지난 여름에 개봉됐던 <화려한 휴가>는 영화 <스카우트>와 비교하면 싸구려 신파 영웅주의로 도배를 해서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몰아세운 작품일 뿐이다. 개봉 당시, 그나마 '광주'를 다뤘다는 점에서 입조심, 몸조심 말을 아꼈지만 이제 광주 문제를 다루려면 <스카우트> 정도는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역사적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스카우트>는 무엇보다 정교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광주항쟁이 벌어지기 일주일 전에서 시작해 바로 당일 새벽에 끝나는 이야기 구조는 그렇기 때문에 총칼이나 시위, 학살의 모습이 전면에 배치되지 않는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주변에 종종 자욱한 최루탄 연기만을 흘려 보낼 뿐이다. 얘기의 중심은 오히려 그것과 크게 떨어져 있다. 대학 야구부의 사무직원으로 일하는 주인공 이호창(임창정)이 갑작스럽게 광주에 온 이유는 오로지 하나. 고교 선수로 대학가에서 '괴물급 투수가 될' 선동렬을 스카우트하기 위해서다. 그에겐 일촉즉발의 광주 상황이 그저 강건너 불구경의 일일 뿐이다. 관심권 안에서는 어떻게 하면 선동렬 부모를 '구워 삶을 것인가'와 과거 대학시절의 애인이었던 김세영(엄지원)을 또 어떻게 하면 다시 '구워 삶을 것인가'이다. 그런데 그 두가지가 다 만만치 않다. 선동렬의 아버지는 이미 자식을 안암골 대학으로 보낼 마음을 굳힌 상태고 옛 애인은 애인대로 그녀의 주변에는 과거 한때 주먹을 날렸던 조폭 두목 서곤태(박철민)가 서성이고 있다. 광주에서 보내는 일주일 동안 이호창의 인생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호창 앞에 놓여있는 두가지의 인생 난제는 그러나, 광주 문제와 조금조금씩 뒤엉키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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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
〈YMCA 야구단>과 <광식이 동생 광태>를 만들었던 김현석 감독은 두 전작에 비해 훨씬 더 업그레이드되고 일취월장된 연출감각을 선보이며 보는 사람들을 쥐락 펴락 한다. 진정한 이야기꾼은 에둘러 에둘러 가면서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핵심을 파악하게 만든다. 소우주(선동렬을 스카우트해야 하거나 구애에서 성공하는 일)의 얘기를 통해 보다 큰 우주(광주항쟁과 같은 사회와 역사문제)의 얘기에 다다르게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까지의 전제는 이야기꾼의 화술이 매우 그럴듯하고 기가막히게 정교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점에 있어 <스카우트>는 비교적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바라보면 김현석의 이번 영화는 소설가 황석영의 '구라' 능력에 젊은 소설가 군을 대표하는 김영하의 '튀는 감각'이 배합된 듯한 느낌을 준다. 엉뚱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지나치게 386세대스러운 반응일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론,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부분도 있다. 아무 생각없이, 무개념으로 살아 온 주인공 이호창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여인을 통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의 눈을 뜬다. 구체적 삶의 과정을 통해 획득한 역사인식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 누구도 쉽게 감행하지 못하는 실천적 행동에 나서게 한다. 구체성의 변증법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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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마지막 장면쯤에서 영화는 보는 사람들의 눈물과 콧물을 뺀다. 시위 주동자로 경찰에게 잡힌 세영을 구해내는 호창은 한바탕 벌어진 소란의 과정에서 (스포일러여서 얘기할 수 없지만) 불현듯 학교 다닐 때 그녀에게 저지른 '나쁜 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비로서 진심으로 사과와 용서를 빈다. 그때가 미안하다는 건지, 지금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혹한 참사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건지, 여하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바보처럼 엉엉 울면서 미안해하는 호창에게 세영은 오히려 이렇게 얘기한다. "아냐 아냐. 오빠. 미안해. 정말 내가 미안해." 둘이 그렇게 부둥켜 한고 우는 모습을 보면 문득, 미안한 사람은 정작 우리들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주에게 미안하고 1980년대를 잊어서 미안하고, 386이 지금의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놔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카우트>는 가벼운 터치로 폐부 깊숙이 남아있는 시대적 죄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기묘하고도 '새로운 발견'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사회와 역사의 변화를 갈망했던 시대를 위해 축배를. 그 시절의 순수했던 열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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