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카르 카푸르 감독이 9년 전 만든 <엘리자베스>의 속편격인 <골든 에이지>는 <엘리자베스>의 말미에서 무사히(!)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가 메리 스튜어트와 반란 진압과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를 겪으며 절대왕권을 다져가는 시기를 다룬다. 영국사에 있어 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사건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항로개발에 있어 다소 시기가 늦었던 영국이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에게서 지배권을 빼앗아 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고, 이는 다시 소위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개척'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기틀을 다진 이가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선대부터 격렬하게 이어져왔던 왕권 다툼에 있어 당당히 살아남은 생존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왕위계승 서열로 엘리자베스의 바로 다음 순위였던 제인 그레이의 경우 원치 않은 왕권 다툼에 휘말려 16세의 나이에 참수를 당하는 비극의 여인이 되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기에 영국의 대중문화는 즐겨 엘리자베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왔고, 불과 2년 전에도 <더 퀸>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이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맡은 BBC 2부작 드라마 <엘리자베스 1세>가 만들어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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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리자베스의 45년간 치세 기간 중에서 유독 메리 스튜어트 및 카톨릭 파로부터 왕권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시기부터 스페인과의 전쟁까지의 기간만을 다룬 영화가, 하필 이 시점에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황금시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영화가, 실제로는 영국의 황금시대 바로 직전, 즉 황금시대를 열도록 가능하게 만든 조건을 확립해간 시기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영국의 황금시대는 이 영화의 엔딩에 해당하는 스페인 함대 격파 '이후', 즉 외부로는 식민지 건설로 부를 축적하고 내부로는 제도와 문물을 정비했던 때로 봐야 할 것이다.) 세카르 카푸르 감독은 9년 전 <엘리자베스>에서 케이트 블랜칫을 내세워 똑똑하고 야심도 있지만 연약하고 두려움 역시 많은 '소녀'로서 엘리자베스 공주를 그려낸 바 있다. 다시 한 번 케이트 블랜칫을 내세워 <골든 에이지>에서 그려내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기본적으로 강단 있고 지혜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자리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들끓는 질투심에 격한 모습을 보일 때조차, 그녀의 행동은 권위적이고 사나우면서도 '여린' 상처의 면모를 내보인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골든 에이지>에서 다루고 있는 두 가지 큰 사건, 즉 메리 스튜어트 반란사건과 스페인과의 전쟁은 국가 내부와 외부에서 각각 엘리자베스의 자리가 아직 불안정하여 도전을 받은 단적인 사건이며, 이것을 넘기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안팎으로 영국의 여왕으로서 확고히 인정과 승인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케이트 블랜칫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또래의 여배우 중 드물게 강력한 카리스마와 연약한 부드러움을 동시에 표현해낼 수 있는 매우 명민한 배우임과 동시에, 남성팬보다는 대체로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배우이다. 그렇다면 세카르 카푸르 버전의 엘리자베스는, 9년 전의 <엘리자베스>에서건 지금의 <골든 에이지>에서건, 현대 사회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신 스스로와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현대의 소위 '알파걸' 내지 '골드미스'의 일종의 역할모델로서 스크린에 호출된 셈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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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와 월터 라일리 경과의 연애담은 매우 상징적이다. 라일리는 달콤한 말로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만 정작 그가 '여자'로서 선택한 이는 엘리자베스가 아닌 시녀 베스이다. 물론 애초에 같은 이름을 가진 데다 엘리자베스가 가장 총애하던 시녀로 그려진 베스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욕망을 대신 투사하는 인물이자, 엘리자베스의 얼터-에고쯤으로 그려지지만, 강하고 권위적이며 정치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엘리자베스는 여왕으로서 자신의 혈연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위치이고,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누군가를 '보살피는' 베스는 시녀로서 혈연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베스가 엘리자베스의 얼터-에고 혹은 투사의 대상이 아닌 그 자신의 독립을 획득하게 되는 순간은 베스가 라일리와 사랑을 나누고 임신을 한 뒤 라일리와의 '결혼'을 통해서이다. 시녀의 위치에서 베스가 누군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남성의 개입과 도움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두 여인에게 모두 '작업을 걸었던' 라일리의 선택은, 물론 베스 쪽이다. 전통적인 시각으로야 물론 여왕이 일개 탐험가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지만, <골든 에이지>에서 이를 그려내는 방식은 오히려 "성공한 남자에게는 여자가 소위 '보상'으로 따르지만 성공한 여자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혹은 "사랑을 얻으려면 사회적 성공을 포기하고 '아내'로서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현대 여성이 처한 딜레마를 드러내는 듯하다. 엘리자베스가 베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은 굉장히 사나운 건 사실이지만 여왕으로서의 권위나 체통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자신에게 단 두 개의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 대한 분노를 다른 당사자에게 퍼붓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은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여성성을 제거하고 유사-남성이 되어야 하는가? 성공을 꿈꾸는 여성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의 위치를 포기해야 하는가? 선택지가 제한된 여성들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여성들, 혹은 자신과 다른 방식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여성들에게 적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성 특유의 특징이 아니라, 그만큼 선택이 제한된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박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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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스페인 전쟁으로 가기까지, 그녀는 소위 여성의 특징이라 얘기되는 부드러움과 두려움, 나약함과 불안함, 정서적인 반응을 하나씩 걷어내고 소위 '절대군주'로서 우뚝 선다. 영화의 중반까지 허리를 졸라맨 긴 드레스를 입고 과장된 가발을 쓰고 화려한 장신구를 달았던 엘리자베스는 영화의 후반, 스페인 전쟁을 맞으면서 (그녀의 가발 중 가장 자연스러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드레스 대신 은빛의 갑옷을 입고 말 위에서 출전 연설을 한다. 물론 흰색의 분장도 지운 채다. 두려움에 떨며 점성술에 의존하던 그녀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몸에 직접 갑옷을 두르고 전장에서 자신의 운명과 직접 대면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을 완전히 버린 것 같지는 않다. 자연스러운 긴 머리칼도 그렇지만, 불바다가 된 스페인 함선들을 보며 벼랑에 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짧은 원래 머리를 드러내면서도 갑옷이나 남자옷이 아닌 부드러운 홑겹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영화의 말미에 하얗게 분칠한 채 마네킨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그녀를 카메라를 360도 회전하면서 비춘다. 그 자신이 대영제국의 살아있는 '상징'의 자리에 올랐음을, 그리고 버진 퀸의 신화를 완성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그리고 성취감을 느꼈을까. 아무리 그녀가 알파걸을 표상한다 해도, <골든 에이지>를 보는 동안 그녀에게 완벽하게 동화되어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는 지금의 여성들이 가장 많이 당면하게 되는 과제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최고의 자리에 서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힐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고 이 자리를 만인에게 인정 받는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혹은, 여기서 조금 방향을 바꾸어 더 나아간다면, 엘리자베스가 여왕의 신분에서도 그토록 좁은 선택지밖에 받지 못한 것과, "베타메일은 '메일'인데 알파걸은 '걸'인" 것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인가. 물론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하든, 무언가를 절실하게 갖기 위해서는 동시에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절대군주였던 엘리자베스나 현대의 여성들이나, 왜 그 '포기'는 이토록 가혹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전쟁을 하거나 처형을 내리는 식 말고, 다른 방식의 질서를 시도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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