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왕 삼성그룹 법무실장이 전격 사퇴한 사실이 10일 알려짐에 따라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그룹 비리 의혹에 대한 논란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될 것인지 주목된다. 특히 이 법무실장의 사퇴 배경에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 책임론?
이 법무실장이 삼성그룹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과 삼성그룹 측이 스스로 밝힌 김 변호사의 퇴직 후 삼성과의 관계를 보면, 이 법무실장이 김 변호사의 '폭로 행보'에 제동을 걸지 못한 책임을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법무실장은 이메일에서 "저는 이런 사태에 대해 법무책임자로서 책임을 지고 오늘 자로 법무실장 직을 그만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막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다음 대목이 눈에 띈다.
이 법무실장은 "김 변호사 사태가 일어난 지 이제 보름 가까이 되었고, 그 전에 내연(內燃)하기 시작한 것부터 따지면 한 달 가까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가 처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기자회견을 한 날짜가 10월 29일로 거의 보름 가까이 지났는데, 문제는 '내연'이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內燃'이란 '어떤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계속 급격히 변동한다'는 뜻으로 김 변호사가 이미 한 달 전부터 폭로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삼성그룹이 김 변호사의 2차 기자회견 당시 내놓은 반박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삼성그룹은 "김 변호사의 전 부인이 협박 편지를 세 차례 보냈었다"고 공개했었다. 그리고 이 법무실장은 이메일에서 "경영진에서는 저의 의견을 존중해주셔서 김 변호사 측의 불온한 편지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며 "그런데 결과적으로 제가 잘못 판단했다"고 자신의 책임을 거론했다. 결국 삼성과 김 변호사가 계속 갈등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법무실장이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이 법무실장과 김 변호사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 측 자료에 따르면 "김 변호사는 주변 지인들에게 '삼성은 DJ 집권 직후 호남 출신인 나를 데려다 잘 써먹고는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이종왕을 데려다 놓고 나를 팽시켰다'고 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법무실장이 김 변호사와 사이가 좋지 못해 통제하지 못한 책임감이 컸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 여론 반전용?
이번 이 법무실장의 사퇴로 여론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도 관심거리다. 일각에서는 김 변호사 2차 기자회견 당시 삼성 측이 발표한 반박 자료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당시 자료는 김 변호사가 삼성을 공격하게 된 개인적 동기와 배경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반면, 김 변호사가 주장하는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불법 경영권 세습, 에버랜드 재판 증인.증거 조작 의혹 등에 대해 구체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사실 무근'이라고 역시 '주장'으로만 맞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김 변호사 측이 삼성의 자료 발표 이후에도 삼성의 주장에 재반박하지 않고 검찰에 고발을 하고 언론 인터뷰를 계속해온 것도 삼성의 '부실 반박'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그래서 이 법무실장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번 이 법무실장의 사퇴와 '장문의 이메일'이 과연 어떤 반격 효과를 갖느냐에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다.
이 법무실장이 이메일을 통해 김 변호사를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인신공격을 하는가 하면, "이 사건의 본질은 김 변호사가 거짓 폭로를 했다는 것", "그러나 이 사건도 이제 어느 정도 방향이나 흐름은 잡힌 것 같다" 등의 말을 통해 논쟁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또 "말없이 직분에 충실한 검사들 가슴에 큰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이른바 '떡값 검사' 논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는가 하면, "삼성은 제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우리 사회의 어느 조직보다 상대적으로 청결하고 건강한 조직"이라고 강조한 부분도 눈에 띈다. 이번 이메일이 '내부용'이 아니라는 의심을 갖게 하는 문장들이다.
■ 삼성에 득인가 실인가?
삼성 측에서는 이 법무실장의 사퇴를 적극적으로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법무실장은 그룹 내 법률관련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첨예하게 법률적 쟁점이 얽혀 있는 가운데 조직을 떠난다는 것은 큰 타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무실장이 작게는 법조계, 크게는 권력 사회에서 갖는 위치를 보면 단순한 '인력 손실' 차원에서만 볼 수는 없다. 이 법무실장은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다. 이는 즉 정상명 검찰총장의 동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8인회' 멤버로, 이 법무실장은 변호사 시절 노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에 참여하기도 했다. 삼성으로서는 최소한 '검찰총장급' 변호사를 잃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법무실장은 검찰에서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덕에 검찰 내에 인맥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사 시절에는 '김앤장'의 간판스타로 활약하며 SK 분식회계 사건, 현대 대북송금 사건, LG 대선자금 사건 등 주요 재벌들의 형사사건을 휩쓸 수 있었던 것도 엘리트 검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그는 삼성에까지 입성했다.
물론 삼성 법무실에는 이 법무실장 외에도 10여 명의 판검사 출신이 여전히 건재한데다, 이 법무실장이 삼성 임직원이 아닌 상태에서 활동의 폭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김용철 변호사의 경우 사실 검찰에서 바로 삼성으로 들어간 점만 갖고도 일반 변호사들과는 질이 다른 '다른 세계(권력 핵심부)에 살던' 사람"이라며 "그런데 이종왕 실장은 김 변호사 보다 레벨이 두 세 단계는 더 높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 김용철 변호사 대응은?
김 변호사는 이번 파문 전개과정에서 줄곧 "사건의 본질은 삼성그룹의 불법 로비 및 비자금 조성, 불법 경영권 계승"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 이유로 '떡값 검사' 명단 공개에도 부정적이다. 따라서 이번 '이종왕 사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제단도 "삼성 측이 이번 사건을 삼성 법무실 문제로 축소.왜곡하려는 것 아니냐"며 "이종왕 법무실장이 떠맡을 문제가 아니다"라고 시선이 이 법무실장에게 집중되는 것을 견제했다.
결국 이번 삼성의 각종 불법 의혹 사건에 이 법무실장의 사퇴가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를 촉구하는 김 변호사 측과 "떡값 명단을 내놓으라"는 검찰 측의 줄다리기가 어떻게 전개되느냐가 향후 논란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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