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여전에 만났던 피터 톰슨은 조금은 늙은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호주의 채널9에서 25년간 자신의 영화프로그램 '피터 톰슨 아워'를 진행했던 이 지식인 할아버지(아직은 그렇게까지 부르면 안될 것 같지만) 평론가는 반갑게 내 손을 잡아줬다. 당신 아마도 날 기억하지 못할걸 하고 물어보니 천만에 그때 너, 나한테 올 때 한 세명쯤하고 같이 왔잖아 한다.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하지만 몇 년 전보다 많이 늙어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 왔다. 하기사 나도 그 사이에 노안이 오고 난리가 났는 걸 뭐. 흐르는 세월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톰슨 할아버지는 영화에 대해 여전히 날카로운 식견을 자랑했다. 4년전 그는 내게 그런 얘기를 했다. "호주영화에는 미래가 없다. 호주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 한편을 보태는 것과 같다." 당시 호주영화산업을 취재하면서 만났던 30명 가까운 영화관계자들 가운데 자국의 영화에 대해 그렇게까지 직접화법으로 비판한 사람은 피터 톰슨 한사람이었다. 까칠하고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시청자나 관객들에게만큼은 친절한 평론가로 유명한 피터 톰슨은 그러나, 인터넷 문화의 빅뱅앞에서는 그 역시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오랜 방송경력을 '끝장'낸 것도 사실 인터넷이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영화정보를 TV나 신문, 전문지를 통해 얻지 않는다. 영화평론가들의 말이나 글을 듣거나 보지 않는다. 평론가들을 믿지 않는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피터 톰슨에게 물었다.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해요?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평론가는 세 종류가 있어. 사람들을 친절하게 영화앞으로 다가서게 만드는 가이드형 평론가가 있고, 버라이어티처럼 산업 내부 얘기만 하는 쓸데없는 인간들도 있으며 저 혼자 잘난 척 어려운 글을 학술형 평론가도 있어. 어떤 평론가가 돼야 하느냐고? 그야 나도 모르지. 그중에서 하나 골라봐. 어떤 게 너한테 맞는지 말야." 글쎄. 그보다 지금까지 난 어떤 평론가인 척 하며 살아왔는가. 피터 톰슨이 은근히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번 째, 세번 째 형은 아니었던가.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친절한 평론가가 될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일단 영화얘기를 하지마. 영화얘기만 하려고 하지마. 영화얘기보다는 그 영화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배경속에 있는지를 더 많이 얘기해봐. 그럼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사람들이 당신이 추천하는 영화를 보러 갈거야. 그거 아냐?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은 말야.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를 보러 가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난 말야. 우리가 정말 공을 들여야 할 사람은 이미 영화에 미쳐있는, 영화광들은 아니라고 봐. 우리가 진짜 성의를 다해 만나야 할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지만 영화에는 별로 목숨걸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을 잡아야 해. 그런 사람들이 극장에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게 될 거야." 피터 톰슨 같은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영화에 대해 다시 한번 믿음이 생긴다. 다시 한번 영화를 정말 사랑하고 싶어진다. 다시 한번 관객들을 믿고 싶어진다. 아 근데, 그러고나서 다시 극장가를 가보니 영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명세의 <M>은 여지없이 박살났으며 <궁녀>도 잘되는듯 싶더니 크게 터지지 못했고 <행복>도 결국 손해를 봤다. <바르게 살자>같은 영화 역시 예전과 달리 아주 성공적이진 못하다. 오다기리 죠가 오기까지 했지만 <도쿄타워>같은 영화는 바닥장세였다. 기무라 다쿠야 주연의 <히어로>같은 영화도 그래서 불안한 구석이 있다. 다들 영화들 안보시고 뭐하시는지. 요즘 시대가 너무 할일이 많다지만 그래도 괜찮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이런 영화를 놓치면 본인들이 손해다. 이건 협박일까? 후우 협박이라도 하고싶은 시절이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최근 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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