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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사회를 위하여-산업화와 민주화의 반세기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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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간적 사회를 위하여-산업화와 민주화의 반세기를 돌아보며

I.
  
  인문학의 위기, 문제와 문제의 테두리
  
  최근에 인문학의 위기가 크게 논의되었다. 위기의 외침이 커짐에 따라 한국 사회와 정부에서도 반응이 컸다고 할 수 있다. 6월에 인문학 진흥에 1000억을 쓰겠다는 대통령의 선언은 그 중에도 큰 것이었고 그에 이어, 액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막대하다고 하여야할 지원금을 배포하기 위해 학술 진흥재단이 인문학 연구 프로젝트를 공모하고 전국의 인문학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연구계획을 작성하여 공모에 응하였다.
  
  이것으로 위기의 외침이 가라앉을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문과학의 위기의식이 한국 경제라는 파이에서 보다 많은 조각을 배정받지 못한 데에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인문과학이 참으로 한국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관계되는 학문활동이라고 한다면, 위기의식은 인문과학 자체의 요구를 포함해서 보다 큰 파이를 요구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이 경제 파이를 부풀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그렇게 추구하는 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적절한 것인가를 묻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물음은 모든 것을 경제로 또는, 경제 소득의 증대와 분배로 환원하는 우리 사회의 상징체계 그리고 현실체계가 참으로 인간의 자기 이해의 전부가 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주의에 대한 답변으로 쉽게 주어지는 것이 인간이 단순히 경제적인 존재가 아니며 정신적인 도덕적 준재라는 주장일 수 있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인간이해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 물음을 묻고 이 물음을 바르게 묻기 위한 인문과학의 방법론을 다시 정비하는 일이다. 연구비의 증대로서 위기와 위기의식이 해소되는 것은 이러한 근본 원인을 생각하고 시정하는 노력을 비껴가는 일이다
  
  지금 이야기한 것은 대체로 얼마 전 학술 진흥재단이 설정한 인문학 주간을 진수(進水)하는 자리에서 행한 강연에서 내가 내놓고자하였던 쟁점이었다. 인문과학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말한 대로, 위기의 본질에 대한 검토와 분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 위기를 조성하는 상황 안에서의 일정한 지위의 확보로써 끝난다면, 위기 의식에서 나오는 문제의 제기 자체가 문제를 만들어낸 상황의 테두리에 수용되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른 문제들의 경우도,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의 관계는 대개 이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반복되는 역사
  
  주어진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에 대하여 맑스가 한 유명한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세계 역사상 중요한 사실과 인물은 두 번 일어난다. 처음에, 그것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역사는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과거에 이루어진 것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이 악몽처럼 살아있는 세대의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그리하여 사람과 사물들을 혁명적으로 쇄신하고,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하는,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점에 과거의 정신을 불러내어 그들 자신에 봉사하게 하고 그 이름과 싸움의 구호와 의상을 빌려 이 오래된 가장(假裝)과 빌려온 언어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을 연출한다."
  
  1848년으로 부터 1851년 간의 프랑스의 혁명 운동을 두고 맑스가 한 이러한 말은, 풍자적 의도를 가진 것이든 아니면 사실적 필연성을 말한 것이든, 많은 정치 운동에 해당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민주화 이후의 정치 과정에도 상당 정도 적용될 수 있다.
  
  역사의 반복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동기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사고의 습관과 같은 것이 그대로 답습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정치 행위에 들어 있는 내재적 논리가 비슷한 사고와 행동을 되풀이 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과거는 직전의 과거의 반복일 수도 있고 역사 속에 침전되어 있는 어떤 오래된 유형의 반복일 수도 있다. 참여정부와 관련하여 신개발주의라는 말들이 나왔지만, 수도 이전 계획, 행정 수도 계획, 그리고 여러 이름의 신도시 계획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말이 참여 정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은 틀림이 없다.
  
  참여정부의 개발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주의를 반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외형적 건설 계획은 가장 쉽게 강한 정책적 의지의 제일 쉬운 표현이 된다는 사실도 그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참여정부가 열정을 보인 것은 과거사였다. 과거사의 경우, 군사정부 하에서 일어났던 일이나 민주화 투쟁에서 일어난 피해에 대한 보상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거사의 치유가 동학 혁명 또는 14세기에 처음 건조되었던 광화문의 원형 복원으로까지 소급된 것을 보면, 거기에 전략적인 고려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군사정부의 행동방식의 반복이라기보다 우리 역사에 깊이 새겨 있는 바,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의 반복은 혁명의 모티프이다. 위에 말한 두 가지 계획--국토 개발 계획과 과거사 계획은 벌써 혁명적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비유적 확대를 시도하면,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모두 포함하는 혁신 개혁이다. 600년을 지속한 수도를 옮긴다는 발상 자체가 이러한 천지개벽의 개혁의지를 집약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와 국토의 계획만으로 참여정부를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 참 의도는 복지국가의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복지, 빈부 격차, 의료, 교육 등은 지속적으로 참여 정부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에서 적지 않은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목표는 늘 거대한 역사 계획 속에서 생각되었다. 그것이 이 사회 목표의 현실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사회 목표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한 원인의 하나는 거대한 역사의 계획의 틀이 그것에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부여하고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일에 있어서도 참여정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고 비판과 반대를 타도되어야 할 적으로 돌리는, 강성 의지의 표현을 특징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공표된 의도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지만, 박정희 정부 이래 군사정부의 특징이 그대로 반복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5·16이 쿠데타인가 혁명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군사정부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였고 그것이 한국사회에 가져온 엄청난 변화로 보아 그것이 혁명적 셩격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또 다른 혁명적 변화를 시도한 참여정부가 그 과거를 반복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복의 극복
  
  위에서 언급한 역사의 반복에 대한 맑스의 관찰은 물론 단순한 사실적 관찰은 아니다.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존재하던 상징적 현실적 유산에 사로잡혀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그러한 과거에의 예속을 넘어서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맑스의 의도이다.
  
  그간의 한국 민주주주의 또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도, 맑스가 요구하는 바와 같은 비판적 반성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적어도 그것은 그간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에 필요한 일이다.
  
  역설적으로 과거의 반복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필요를 말한 맑스도 극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민주화 운동의 많은 특징, 그것의 혁명으로서의 특징도 맑스주의와의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라고 하여야겠지만, 민주주의도 여러 가지이고, 거기에는 여러 다른 요소들이 끼어 있었다.
  
  그 중에도 민주화 운동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크게 작용한 것이 맑스주의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은 민주화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살핌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되어 마땅하다.
  
  그렇다고 맑스주의로서 민주화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맑스주의는 혁명적 정치 행위의 원형으로 생각될 수 있다. 맑스의 극복의 문제는 민주화 운동을 포함한 여러 혁명적 변화 운동에도 해당된다.
  
  북친과 맑스
  
  위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로부터 인용한 역사의 되풀이에 대한 맑스의 말은 미국의 정치 사상가 머리 북친 Murray Bookchin 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맑스의 극복이었다.
  
  이 북친의 역설적인 입장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생각하는 데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할 수 있다. 북친의 지적 편력은 자본주의 소련 혁명을 지지하는 맑스주의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주의의 강압적이고 전체죽의적인 체제가 드러나게 되면서, 그는 트로츠키주의를 거쳐 아나키즘으로 옮겨갔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편력에서 일관되게 그는 자본주의를 착취와 억압의 체체로서 인간의 자유와 인간성의 실현을 억압하는 인류 억사의 암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검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도 그것이 대체하고자하는 체제의 모든 억압적인 특징을 반복하여 계승하는 체제였다. 1960년대에 그는 미국의 "반주류문화counterculture" 운동에서 아나키즘을 향한 새로운 정치 변화의 기회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의 맑스주의에 경도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맑스 자신의 말을 빌려 맑스주의 극복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맑스를 폐기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맑스의 계급 없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의 이상을 그대로 받아드렸지만, 맑스의 처방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맑스는 당대의 사회 이해는 정확하였지만, 새로운 시대에 반복 젹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에는 이미 그 자신의 이론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야 한다는 근거가 있었다.
  
  북친의 생각으로는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조직의 틀을 결정한 것은 빈곤의 경제였다. 빈곤의 상태에서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물질생산의 필요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이든지 사회주의이든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작업의 조직을 요구하고 작업의 기율의 강제를-청교(淸敎)적 노동 윤리이든, 프롤레타리아 윤리이든-요구한다. 기율은 권위와 위계에 의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노동자의 복종으로 보장된다.
  
  어느 쪽에 있어서나 그 권위는 국가 체제를 통하여 행사된다. 두 체제 사이에 차이는 체제의 지배자가 부르주아 계급이냐 당이냐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도 자본주의적 생산을 목표로 하되 그것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보다 일관된 계획을 통하여 추구한다. 공산주의에서 이것은 일관된 국가 체게가 맡는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체제는 국가 자본주의가 된다. 그러는 사이에 자분주의 체제도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겨 계획 경제적인 성격을 띠우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동계급에게 보다 낳은 지위를 부여하여 체제의 일부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제 서구 사회는 풍요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것은 모든 문제를 뒤집어 놓는다. 그럼에도 위계와 기율의 억압은 계속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행복은 달성되지 아니 한다. 필요한 것은 풍요의 경제를 참으로 인간적인 목적에 봉사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혁명을 가져올 사람은 노동의 권위주의적 기율을 거부하고 가상의 물질적 번영이 아니라 보다 자유로운 삶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이다. (cf. ""Listen, Marxist!," Post-Scarcity Anarchism [Palo Alto, Calif.: Ramparts Press, 1971].) 이것이 그의 맑스 극복의 이유였다.
  
  1970년대 이후의 북친의 사상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생태적 아니키즘으로 귀착한다. 보다 해방된 인간의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원리로 하는 사회이다. 자연에는 물론 인간의 본성도 포함된다. 자연에 순응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스스로의 본성의 요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은 인간 현실의 직접성을 떠난 거대 국가 조직에서 보다 작은 공동체에서 실현될 수 있다. 큰 규모의 조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작은 공동체의 연합으로서만 인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960년대의 "반주류문화"의 젊은 세대에 걸었던 북친의 기대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그의 생태적 자유 공동체의 이념은, 그 타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현실적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독단론에 대한 비판은 지금도 타당성을 갖늗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으로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지금의 시점에서 그 현실적 기반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맑스와 그에 유사한그것의 독단론적 사고의 유산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그리하여 위에서 비친 대로, 한국의 진보주의의 문제점의 하나가 맑스주의 또는 추상적 사회 이론의 기본적인 구도를 내장하고 있다고 점이라고 한다면, 맑스주의와 기타 독단론의 지양은 우리에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건대, 북친이 맑스주의에서 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 현실 정치에서의 행동방식이다. 즉 당이나 국가 또는 이념의 위계와 권위가 현장 현실을 등한시하게 하고 인간적 억압을 항구적인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특히 지적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사회와 정치의 권위주의적 체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라는 사실이다.
  
  맑스주의는 인간역사의 진로 전체 그리고 사회의 구조와 작용 전체를 장악하고자 하는 지식의 체계이다. 이 지식의 전체성에 대한 주장이 그에 입각한 정치 행동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전체적 진리는 논리적으로 권위주의적적 정치 체제에 귀결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다른 사회 이론의 경우에도 경계해야하는 점이다.
  
  시스템적 사고와 현실
  
  사실 문제는 맑시즘이 아니다. 현실을 하나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지적 기획이다. 맑시즘은 오늘의 이러한 현실 이해를 위한 하나의 비유적인 모델이 될 뿐이다.
  
  모든 전체적인 또는 전체적인 진리에 대한 주장을 가진 이론 또는 이념은 관념의 세계에서 그리고 행동의 차원에서도 전체적인 복종의 체계를 요구한다.
  
  우리 전통에서는 우주의 근원부터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의 정통성 속에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성리학이야 말로 더욱 철저하게 그러한 연계 관계를 보여주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거꾸로 절대적인 복종의 필요가 정통성의 이데올로기를 낳는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절대 권력과 모든 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일괄하는 이데올로기는 상호의존적인 관계 또는 교환관계 속에 있다.
  
  이론적 현실 이해와 정치 현실과의 관계는 전체화되지 않은 경우에도 문제적인 것일 수 있다. 정책과 현실이 빗나가기 쉬운 것은 이 관계가 본질적으로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야심이나 야망이 개입되는 경우 이 관계는 더욱 문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여러 개발개발 계획이나 부동산 정책 또는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들-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그 복지, 의료, 교육 정책이 반드시 현실 정합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원인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의도하는 정책의 차질에는 이데올로기적 오만의 책임이 작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의도가 정당하고 그 의도의 실현이 이데올로기적 현실 이해에 의하여 약속된다고 생각하면, 현실에 대한 면밀한 주의는 느슨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맑시즘을 비롯하여 모든 거대 이론은 이러한 단순화를 조장한다.
  
  현실의 법칙과 인간성의 요청
  
  그렇다고 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의 구도들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사화와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없이 또는 주어진 현실을 추상적 개념으로 전이함이 없이 어떻게 현실을 제어하거나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자크 데리다의 맑스주의론인 <맑스의 망령 Spectres de Marx(1993)>은 여기에 대한 긴 성찰을 주제로 한다. 이것은 극히 난해하고 모호한 책이다.
  
  이것은 데리다의 글쓰기의 습관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가 착잡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정의를 생각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추상화, 그것을 넘어가는 가설들을 만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받아드린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동시에 그러한 추상화와 가설화가 출발점의 희망에 대하여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구되는 것은 추상화를 받아드리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시 해체하는 작업을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다른 데에서 말하고 것을 빌려 오건데, 그는 인간 해방의 민주주의는 "자기 한정적인 해채의 주체"로서만 간신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무의 정치학 Politiques de l'amitie [1994])
  
  데리다가 말하는 아포리아의 해법은 우리의 편의에 맞게 조금 더 쉬운 말로 옮겨 질 수 있다. 즉 그것은,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큰 비전을 유지하되, 그것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경우에 미래는-보다 나은 인간적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미래-는 인간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필연성의 열매가 아니다. 미래는 반드시 역사 변화의 법칙에 함축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역사 법칙을 작동할 수 있는 계기를 쉽게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가설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소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은 도덕적인 요청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도덕적 요청이 법칙에 가까이 간다면, 그 법칙은 사실의 법칙이라기 보다 인간성의 법칙이다.
  
  요청 (Postulat)은, 철학에서 말하듯이, 어떤 사실이 존재하기 위해서 상정해야할 원리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증명할 수 없다.
  
  칸트는 도덕률이 존재하기 위하여 상정해야 할 몇 가지 원리들을 포스툴라트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거기에서 도덕률이 나온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도 도덕률은 사실적 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기술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적 행동에서의 당위성을 말할 뿐이다.
  
  가령, "당신의 행동이 모든 사람이 보편적 규범으로 받아드리기를 원하는 규범에 따라서 행해지도록 하라"는 유명한 지상명령이 반드시 사실의 관점에서 필연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의 행동과 다른 사람의 행동 사이에 어떤 보편적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도리는 없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나와 나의 행동이 그러한 보편성으로부터 예외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특권은 바로 이러한 예외를 원한 결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규범의 당위성은, 칸트가 생각한 것으로는, 영원히 불사(不死)하는 영혼의 존재와 같은 가설 또는 요청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보다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평화 공존의 꿈을 위하여 필요한 도덕률이다.
  
  이 요청의 기초는, 다시 말하여, 경험적 세게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모든 사람에게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인간 내면 깊이에 자리한 인간성이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률은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사회가 요구하는 원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적 법칙 속에 자리한 필연성이 될 수는 없다.
  
  꿈과 욕망의 현실 번증법
  
  그러나 보다 낳은 사회에 대한 요청, 사람이 갖는 그러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것들은 현실에 대하여 완전히 무력한가?
  
  나는 70년대에 인도의 유명한 철학자 문인 라자 라오(Raja Rao)를 만난 일이 있다. 하와이 대학의 정원에서 가졌던 긴 대화 중, 그는 그가 가졌던 꿈은 다 실현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내가 놀라움을 표하자, 다시 그는, 관건은 그 꿈을 얼마나 절실하게 간직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는가가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황당무계한 것처럼 들리지만, 다른 한쪽으로 그것이 인간 현실을 완전히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것도 그러하지만, 사회적인 꿈의 경우도 그러하다. 물론 꿈을 지니면, 그것을 끈질기게 지니기만 하면, 꿈이 현실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꿈은 현실에 이어지고 현실에 작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꿈에서 현실로 가는 통로는 필연의 법칙에 의하여 열러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삶은 끊입없이 현실에 대응하면서 지속된다. 그 대응의 동기에는 지금의 삶을 살며 미래의 삶의 가능성-내자신의 미래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그리고 다른 인간들의 삶-에 대한 고려와 배려가 작용한다. 이 배려는 현실을 변호시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순전히 임기응변적인 실용주의만을 말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이 실요주의라면, 그것은 인간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넓은 고찰을 포함하고 그것에 연결되는 현실의 조건을 생각하는 실용주의이다.
  
  이것은 20세기의 사회적 실험이 실패한 지금에 와서 그래도 남아 있는 보다 나은 사회의 실현을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보인다.
  
  II.
  
  신자유주의와 현실적 대책
  
  오늘날의 현실을 크게 정의하는 말로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정의되는 현실은 옹호되기도 되고 매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신앙처럼 받아드리면서, 그것이 결국은 보다 많은 부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추구로 인하여 생기는 사회 문제-빈곤층의 문제-도 해결되게 마련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 특징은 자본과 산업의 자유로운 이동이다. 이 이동은 경제 전제에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만, 노동시장의 직업 안정성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직업을 잃게 되는 데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임금 노동인력을 찾아 산업이 국경을 넘어 옮겨 갈 때, 국가 경제도 새로운 대체 기업이 생기지 않는 한 중대한 시련에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 열려 있는 세계 시장에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장의 이점은 다시 다른 나라로 옮겨 간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 이점의 가장 큰 혜택은 중국이나 인도로 옮겨 갔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열러 있는 세계 시장의 이점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할 수 없다.
  
  빈부의 격차의 확대가 일어나고 그로 인한 사회 불안과 인간 고통이 증대된다. 순수한 신자유주의 체제-그러니까 세계 자본시장에서의 이윤 경쟁에 맡기면 인간 생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게 한다는 믿음-에 입각한 체제가 있을 수 없지만, 미국이 아마 거기에 근접하는 경제 이념에 의하여 움직이는 대표적인 국가가 될 것이다.
  
  미국의 빈부 격차나 가난한 사람의 수는 선진국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미국의 빈곤이 아프리카 국가의 빈곤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부정적인 효과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인 현실 이해를 대체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세계를 하나의 사회 체제에 묶어 놓는 세계 경제 체제가 있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일률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사회 대책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일이다.
  
  이들 국가는 복지 국가 또는 사회 민주주의 국가로 간주될 수 있는 나라들이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빈곤의 문제나 의료 또는 각급 교육의 문제 등이 완전히 무자비한 자유 경쟁에 맡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시자유주의만을 탓하는 것은 전혀 무익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테두리 안에서도 자기 방위책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위책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테두리를 넘어가는 발상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거대 체제를 또 하나의 거대체제로 대체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러나 저러나 흔히 이야기될 수 있는 방위책은 모호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화 속에서의 자본의 움직임은 한편으로 저임금과 확대된 시장의 확보를 용이하게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통제를 약화시킨다.
  
  기업의 이동이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노동 유연성에 대한 하나의 대책은 재교육의 기회를 늘이고 직장 이동의 기회를 넓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의 대책은 실직에 대한 그리고 의료나 교육에 대한 복지 혜택을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과 직장 이동 또는 복지 혜택이 진정한 의미에서 적절한 수준의 삶을 보장해주는 경우는 벽로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직장과 생활의 최소한도의 문제를 떠나서, 빈부의 격차는 그것대로, 원인이 세계화에 있든 단순히 자본주의적 불평등에 있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하여 재분배의 문제는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된다.
  
  그런데 빈부 격차의 해소를 위한 재분배는 기존 사회 체제와 가치에 대한 동의를 함축한다. 즉 그것은 부 그것을 삶의 핵심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그것을 생산하는 체제를 사회의 존재이유로 받아들인다.
  
  경제 성장에 대한 분배의 주장을 '빈곤의 균등한 분배'으로 비아냥하는 수가 있지만,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 빈부 격차 해소대책은 '탐욕의 균등한 분배'를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론적인 해석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물질적 가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회적 평등으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하더라도 물질의 무한한 추구는 팽창추의, 제국주의 그리고 환경 파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성의 왜곡을 가져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문제를 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아닐는지 모른다. 다만 이러한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은, 서두에 말한 인문과학의 문제처럼 해결이 문제적 상황의 계속에 동의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예를 말해보자는 뜻이다.
  
  또는 그 테두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근본적이 해결을 찾지 못하고 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빈부문제 해결의 일환으러서의 부동산 문제의 처리에서 보는 것도 그러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최근의 작은 예만 보아도, '소위' 반값 아파트의 부진은 오늘의 시대가 규정하는 주거의 테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자가당착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즉, 그것은 이 시대의 규정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전에는 주거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값' 아파트에 입주 신청이 별로 없는 것은 서민의 수입에 비하여 그 월세가 너무 비싼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보다 더 큰 원인은 아파트 구매가 토지 구입으로 분리된 것 그리고 구매 이후에 20년간 전매가 금지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마땅치 않는 조건이 되는 것은 주거가 주거 목적에 못지않게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된 때문이다. 위의 두 조건은 아파트 소유로부터 재산 증식의 의미를 박탈한다. 아파트를 이렇게 주거가 아니라 재산으로 받아드리는 것은 잠재적 아파트 입주자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거의 부동산화 또는 동산화를 촉진한 것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다. 노무현 정부의 집념이 되었던 신도시 건설은 바로 토지와 주택을 재산으로 전환하는 사회 과정을 더없이 촉진하는 방법이었다.
  
  신도시 건설을 위한 보상비가 부동산투기 자금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자주 지적되는 바이지만, 그 이전에 그것은 인간의 주거의 유기성-기억과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된 관계로 이루어지는 주거의 유기성을 완전히 추상적인 의미-로 단순화하였다.
  
  그러한 정책의 발상에 주거의 유기성에 대한 이해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주택 건설은 교환이 가능한 편의 시설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주택의 인간적이고 공동체적 성격을 향상하자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판은 소위 균형발전 계획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균형발전은 단순히 도시의 편의와 부를 지방으로 옮기자는 것으로, 특정 지역을 그 내적인 잠재력을 발전시켜 보다 인간적인 고장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는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과거는 반복된다. 기존의 사회의 문제를 시정하는 일도 기존의 사회의 문제의 틀 안에 움직인다.
  
  소비 증대와 작업의 기율
  
  도시를 지방으로 확산하자는 계획은 외부의 계획자들에 의하여 하향식으로 부과된다. 그것이 현지인의 발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계획이 현지에서 자라나오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은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배워와야 한다. 가장 간단한 것은 물론 정부의 정책 입안자가 가지고 있는 국토 계획에 의하여, 전체적인 사회 계획의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지방을 혁신하는 일이다. 빈부의 격차의 해소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획의 핵심은 자본주의적 경제의 결과로서의 도시를 전국화하는 것이다.
  
  모델은 자본주의적 유토피아이다. 여기에서는 물론 소비가 미덕이다. 소비는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욕망은 시장이 조종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나 자신의 본래적인 욕망은 아니다.
  
  그리고 증대하는 욕망과 증대하는 소비를 위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하여서는 자본주의 작업의 질서 속에 편입되어 그 능률과 경쟁의 작업의 기율에 순응하여야 한다.
  
  자본주의적 스타카노비슴의 강화는 불가피하다. 일의 스트레스는 피상적인 오락과 격렬한 쾌락으로 보상된다. 사회 평등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삶이 어떤 한정된 부류의 사람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평등의 정치 이상은 이것의 시정을 의도한다. 그리하여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부의 또는 탐욕의 균등 분배를 보장한다. 그리하여, 국가 자본주의의 정부가 생산 질서를 부과한 것처럼, 부의 균등 분배는 소비의 질서를 부과한다.
  
  이것은 하나의 권위주의적 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최악의 경우 최소한도의 생존은 사회 안전망에의 편입으로 보장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넘어가는 추상적 통제망(網)에 포확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생존의 안전망, 부의 균등 분배 또는 그 약속, 물질생활의 향상-이러한 것들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다.
  
  또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 적어도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인간이 원하는 행복을 실현시켜주는 거은 아니다. 거대한 규모의 생산과 소비의 질서는, 국가 체제에 의한 것이든 기업의 체제에 의한 것이든. 거대한 조직, 거대 제도를 요구한다.
  
  거대제도는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하다. 이것을 넘어가는 데에는 내적 발전의 기회가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봉쇄되는 것이 거대 제도이다.
  
  추상적 거대 제도와 구체적 인간
  
  거대 제도의 비인간성을 완화하는 데에는 개인의 구체적인 사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법률과 사회 제도에서 엄격한 이성적 판단의 비인간성을 완화하는 데에는 구체적 인간의 구체적 상항을 섬세하게 고려할 수 있는 "지각적 균형'--사물과 사람의 유동성을 따라 갈 수 있는 감각의 보완이 필요하다. (cf. Martha C. Nussbaum, "Perceptive Equilibrium : Literary Theory and Ethical Theory," Love's Knowledge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그리고 이런 필요성은 물론 제도의 비인간성을 증언한다. 그것은 보다 인간적이어야 한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추상적 위계질서의 냉정성 속에 존재하여야 하는 인간적 고려를 표현하는 말이다. 비인간적 제도 하에서 이것의 의미는 양의적인다. 그렇다는 것은 부패도 여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규제가 많은 제도에서 부패는 비인각적 제도에서 구체적 인간적 접촉의 통로를 뚫고 인간적 배려를 확보하려는 의도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회식과 같은 자리에서의 비공식적 접촉일 수도 있고 실제 뇌물을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엄격한 제도는 부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 보완책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삶에서 자기 나름의 만족을 얻고, 지기를 실현하고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도와는 에두름의 관계를 가질 뿐이다. 물론 제도적 위계질서에의 편입도 그나름의 만족을 줄 수 있다. 돈을 벌거나 과시적 소비에 탐닉하거나 관직에 나아가 높은 자리를 얻거나--이러한 일들은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실현과 자기 만족을 준다고 할 수 없다. 또 그것은 경쟁과 투쟁을 불가피한 것이 되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사회적 생존과 양립할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이 사회적 조화 속에 사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때, 사회의 위계 안에서의 자기 성취는 인간의 반사회적 성향,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을 조장하고, 궁극적으로 진장힌 의미의 행복을 파괴하고 만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삶의 높은 형태는 자유와 자율성 안에서의 인간적 완성을 통한 자기실현이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면서, 사회의 도움을 통하여 보다 용이한 또 보다 높은 차원의 성취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문화적 자기 수련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물질주의적 체제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함께 내적 성장의 전통적 방법을 왜곡한다. 그 가장 중요한 기구가 교육이다.
  
  학교 교육이 담당하는 것은 인간의 내적 발전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러하다. 교육은 첫째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독특한 재능과 소명을 확인하는 것을 돕든 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면서 교육은 사회 속에서 일정한 기능--자신의 유기적 전체성의 큰 희생이 없이 가회에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일을 준비하게 하여야 한다. 물론 학교 환경 자체가 이 모든 것의 실습장이 된다. 교육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 교육은 오로지 사회 진출의 관문의 역할을 할 뿐이다. 여기에서 경쟁의 비인간적인 치열성이 생겨난다. 그것도 정부 처리 능력 하나가 기준이 되어 벌리는 경쟁이다. 정부에서 학교의 평준화에 집착하는 것은 이 치열함을 완화하자는 것이나.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정부의 평준화 정책에는 여전히 교육을 획일적인 우수성의 척도로 잴 수 있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들어 있다.
  
  다만 그것은 이 척도를 조금 무디게 하자는 것이거나 우수성의 순위 배분을 고르게 하자는--자가당착적--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격 요건을 어떻게 하든, 또는 그 요건의 규정을 넓이를 크게 하든 작게하든, 우리에게 교육은 관문이다.
  
  교육을 통한 것이든 독자적인 수련을 통한 것이든 위계질서에의 진출-부와 명성과 권력이 절대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는 위계질서에의 진출-이 관문 통과의 목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진정한 만족이나 행복 그리고 자기 실현은 존재하기 어렵다. 개인은 추상적 기준으로 획일화되지 않는 개인의 구체적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제도 교육에서 자주 들먹여지는 우수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개인의 발전시킨 우수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쟁질서가 한정하는 우수성이다. 인간의 가능성의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우수성은 한 가지 관점에서 재어지는 것일 수 없다.
  
  그러면서 그것은 개인의 고유한 능력이고 고유한 삶의 진로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발달은 개체적 발달이면서, 되풀이하여 말하건대,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의 발달이다.
  
  그것은 이 보편성의 테두리 속에 존재한다. 그 사회적 의미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 개성의 발달에 도움을 주고 그것을 위하여 사회적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한 사회의 교육적 기능이다. 그것은 사회의 인간적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이기도 한다.
  
  자신의 내적 가능성에 집중하는 개성의 발달은 일정한 기중에 이르면 거기로부터 다시 보편적 지평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은 이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개인의 발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을 사회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한다. 이러한 인간의 사회적 조건이 저절로 교육의 효과를 발휘하고 동시에 삶의 충족감을 높인다. 보통 사람이 원하는 것은 체제화된 교육도 아니고 무작정의 개인 능력의 발달도 아니다. 그것들은 행복이나 삶의 보람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다.
  
  개체의 발달에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행복의 조건의 하나이다. 개인에 거의 본능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그러나 자신의 구체적 전체를 잃지 않으면서 관계할 수 있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절실한 필요이다. 이것은 극히 친밀한 관계와 조금은 거리를 유지하여야 하는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협동적 관계가 생존의 조건이 된다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그것은 개인의 행복의 일부이다. 관료 체제, 추상적 행정 체게가 파괴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인간관계의 행복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체제의 일부로서의 인간은 개체로서도 그 구체성을 손상당하게 된다.
  
  III.
  큰 사회와 작은 공동체의 인간성.
  
  추상적 사고와 거대 기구에 대하여, 인간의 개체적인 발달, 협동적 관계에 대한 요구, 친밀하고 친목하는 관계, 또는 한 때 이반 일리치 Ivan Illich가 conviviality 라는 말로 유명하게 만든 '함께 사는 즐거움'--이러한 것들이 현실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작은 동네이고 공동체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거대 계확이 주의하지 않는 것은 작은 공동체의 중요성이다.
  
  체제주의적 사회사상에 대항에서 작은 공동체의 중요성-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자기를 돌봄과 함께 남을 돌보며, 자연 속에서 노동과 삶을 즐기는, 인간의 안정된 삶의 터전으로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의 하나가, 서두에 언급했던, 머리 북친이다.
  
  그는 누구보다 일쯕이 환경의 위기에 반응하고, 사회와 인간의 비인간화 문제가 어떻게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 이어져 있는가를 선구적으로 이야기한 바가 있다.
  
  일찌감치 1965년에 쓴 "에콜로지와 혁명사상 Ecology and Revolutionary Thought" 은 오늘날에야 우리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의 여러 문제들을 철저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환경 문제는 단순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조직의 문제이다. 작은 자연 공동체를 떠난 산업과 도시화와 체제화 그리고 대중화는 인간성을 파괴한다.
  
  "(산업조직이 가져오는) 자연환경의 단순화, 원초화 그리고 조잡화는 문화적 물리적 차원을 갖는다. 거대한 도시인구를 다스리는 문제--밀집하여 붐비는 수백만의 인간에게 교통, 식료, 고용, 교육, 오락을 마련하여 주는 일은 시민사회의 행동기준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수의 대중의 틀로서 사람을 보는 것-전체, 집중, 조직화의 관점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경향이 과거의 개인화된 인간 개념을 압도한다.
  
  관료적 사회 조종 기술이 점차 인간적, 인간주의적 방법을 대체한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창의적이고 개성적이었던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통제되고 대중화된 것에 맞부딪힌다. 개인의 공간은 얼굴 없는 비인간적 사회 기구가 부과하는 여러 제약으로 계속 좁아들어 간다.
  
  개인 고유의 품성은 점점 대중의 최소 공약수의 조종에 내맡겨진다. 계량화된 통계적 방법, 벌통의 벌 다루 듯 하는 사람 다루는 범이 섬세하고 질적이고 개체화된 자세--고유한 개인의 품성, 자유로운 의사 표현, 문화적 복합성을 존중하는 자세를 대체하게 된다. (Post-Scarcity Anarchism, pp.65 -66.)"
  
  위에서 북친이 말하는 것을 되풀이하면, 개인이 전체화, 집중화, 조직화, 관료화된 사회에 편입되고 얼굴없는 비인간적 사회 체제 속에서 표준화, 계량화된 통계 수자의 일부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 현대 사회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의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특성인 자발성, 창의성, 독창적 개성이 상실되고 그것을 아낄 수 있는 인간적 또는 인간주의적 태도가 사라지고 이것들 보호해줄 개인의 공간도 사라진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시회적 삶의 대규모화와 그것을 관리하기 위하여 필요해진 얼굴없는 관료체제에 있다. 그 경제적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에 있어서 생산과 소비의 규모가 거대화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산업사회의 비대화라고 하여도 좋다. 이러한 비인간화된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후자의 부정적 특징을 착취라고 할 수 있다면, 전자의 특징은 억압이다. 그러나 본연의 인간성,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의 소외는 어느 쪽에나 변함 없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태를 집약하여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도시이다. 어쩌면 도시와 같은 인구 집중과 황폐한 물리적 환경이 저절로 사회의 비인간적 조직화와 인간성 상실을 가져온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북친은 현대 사회의 인간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작은 공동체의 사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으로는 "균형이 있는 사회, 대면 (對面)이 가능한 민주주의, 인간주의 기술, 분권(分權)사회"를 말한다.(Post-Scarcity Anarchism, p.69.) 이것은 그의 생각으로는 아나키즘의 개념들이지만, 그의 아니키즘은 정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와 기술의 전적인 재편성을 요구한다.
  
  그 중에 근본이 되는 것은 환경이다. 위에서 '균형이 있는 사회'라는 것은 자연을 인간의 자원으로 그리고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생태적 균형을 갖춘 사회를 의미한다.
  
  자연은 다양한 생명체 사이의 생태적 균형-수만 년, 수억 년의 진화의 결과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생태 균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의 유지 지속 없이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위하여 이 자연의 생태적 균형에 순응하여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의 자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위하여는 그에 대한 사려가 있는 기술의 개발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핵심적인 것은 모든 것을 소규모화하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 사는 현실을 서로 지면(知面)이 생실만한 사회적 틀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여야 힌다. 이것을 넘어간 사회는 불가피하게 대규모의 조직-정치, 경제, 기술, 관료 조직-을 끌어드린다.
  
  이것은 정치적 의도의 선악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대규모 조직은, 그 정치 이상에 관계없이, 사람의 삶 자연스러운 유대감을 물론 윤리와 도덕과 문화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적 사회의 비전과 현실
  
  그러나 북친의 대면 공동체의 타당성을 완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것이 오늘의 사회에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북친 자신, 그의 생각이 옛날의 농촌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낭만주의자의 향수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러 가지 증후로 보아서 과학과 산업의 발달이 가지고 있던 해방적 기능은 소진되었고 사회, 정치, 인간성, 환경 등의 관점에서 문제만을 발생케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이상 지속될 수 없는 문명의 형태라는 것은 분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북친은 산업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감성의 훼손과 인간 소외가 결국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그것이 아무리 여러 사람에 의하여 느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의 근본적 개조에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북친이 위에 언급한 글을 쓸 때는 혁명적 분위기가 다방면적으로 일던 60년대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는 같은 주제를 계속 발전시켜 환경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실 환경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결국은 감수성의 변화가 현실로 변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급박한 자연 재난의 위협이 있기 전에는 그것이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권력이거나 자연의 위협이거나 힘만이 사람을 복종하게 한다.
  
  하지만 북친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산업 체제의 비판과 인간 공동체의 제안이나 기획들을 무시하는 것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일 것이다. 그의 이상에 동조하던 아니 하던, 하나의 교훈은 겨대 계획을 통하여 오늘의 사회의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고쳐나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또는 계급사회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말할 것도 없이 맑스주의이다. 반드시 맑스주의가 아니라도 많은 사회 비판은 직접 간접으로 맑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비판의 강점은 현실의 변증법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미래 사회도 이 변증법의 전개의 최종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은 이렇게 하여 도출된 미래의 계획이 과거와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현실의 변증법 그것이 이미 현실로부터의 탈출이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맑스주의를 비롯한 여러 비판 이론에서 비판적 시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현실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현실과 인간과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인간성에 비추어 성립하는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다. 현실이 있는 한 그에 대한 비판은 그 현실에 끈질기게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맑시즘을 비롯한 사회 비판에서 비판적 부분은 미래의 세계에 대한 투시도보다 더 타당성을 가지며 현실 개혁을 위한 인간의 시도를 유발한다. 그러나 그 개혁은 그 혁명 전략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비판 이론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타당성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 변화를 위한 혁명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소외없는 사회에 대한 비전으로 타당성을 갖는다.
  
  한 때, 소위 서구 맑스주의에서 맑스의 사회 경체 이론에 대하여 인간적 소외를 논한 글-"인간의 종적 분질" 또는 "인간적 본질"을 비판의 핵심 개념으로 생각한 맑스의 초기 저작-이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도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지금 필요한 것은 맑스의 초기 인문주의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여러 다른 비전--맑스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라고 생각했던 많은 비전을 다시 되돌아 보는 일일 수 있다.
  
  오웬이나 푸리에, 크로포트킨의 사회 이상들도 어떤 사회 속에서 인간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조금 길게 언급한 북친의 생각도, 그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행복한 사회에 대한 중요한 비전의 하나이다.
  
  이러한 비전을 상기하는 것은 사회의 인간적 가능성을 증대하기 위하여 또는 기존 제체의 인간성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작고 큰 시도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북친이 설명하려고 하는 바와 같이, 그 시도는 큰 것보다는 작은 것, 작은 것들의 누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판적 자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북친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본래적 또는 본질적 인간성 그리고 인간적 가능성에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잡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일이다. 북친은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말하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의 특징으로 자유, 자발성, 창의성, 개성과 같은 특징을 든다.
  
  이것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 인간적인 사회이다. 자본주의적 발달이나 사회주의적 혁명 개혁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산업과 사회의 거대 조직이 말살하는 것이 이러한 인간성의 특징이다. 여기에 대하여, 이것을 존중하고 발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소규모 사회이다.
  
  그러나 정치 기획을 생각하는 한국인에게는 산업과 사회 조직의 강화 그리고 대규모화는 바로 해방의 매개체로서 생각된다. 산업화, 근대화, 집단화 현상은 자랑스러운 성취이다. 우리 진보주의가 포용하고 있는 개발주의는 바로 이 사실을 표현한다.
  
  그런데 사실 자유, 자발성, 창의성 등 개성적 표현을 중요한 가치가 되게 한 것도 거대 조직을 가져온 산업화와 민주화이다. 그러한 인간적 품성에 대한 인정은 근대적이 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일어난다. 개성적 자유는 근대적 자아의 권리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가능한 자아는 그 조건, 즉 산업과 사회의 거대화의 기제에 의하여 규정되는 자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것은 생산과 소비에 시스템에 의하여 형성된다. 여기에서 자유는 소비의 자유이다.
  
  근대화는 이와 같이 자유의 확대와 동시에 노예화를 가져 온다. 그리하여 본질적 자아, 진정한 자아는 비판적 자아 의식에의하여 회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시사될 뿐이다.
  
  어떤 경우에나 인간성이 자연스럽게 주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인간의 자아가 완전히 역사적 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적어도 역사를 진화의 역사로 본다고 하더라도 흔들릴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자아 그것도, 방금 할한 바와 같이, 자기 비판적 분석을 통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보다 복합적인 의미의 자아가 그러한 회복의 절차를 통하여 주제화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성에 대한 직관의 근거는 나라는 자아이다. 나는 자기반성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 반성으로 자아를 확인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오늘날 자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대체로 당대의 주체의 체계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 체계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 체계는 한편으로는 욕망의 체계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와 같이 집단적 담론이 강한 사회에서 특히 그러한 것이지만, 집단의 인정의 체계, 정당화의 체계이다. 그런데 진정한 자아가 회복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회복되어야할 자아는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도 역사적인 업적으로서만 획득될 수 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자아이다. 이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자아와 세계와의 갈등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 갈등이 심화되고 자아가 스스로를 정화함에 따라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사고하는 자아가 된다.
  
  그것은 세계의 법칙적 이해를 위한 무색 투명한 원리이다. 이 세계는 사물과 사회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 자아는 인식의 원리로서 내용을 결하고 있는 자아이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갈 때, 그것은 스스로도 이 법칙의 사실적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알 게된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체로, 사물의 세계에 던져진 실존적 자아로, 또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자아로 파악한다. 이 자아는 객체화된, 부자유의 자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은 생물학적 사회적 조건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는다. 이 경험의 사실성 속에 이 자아는 매몰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험은 그 다양한 변화로 하여 사람에게 스스로를 변화면서 변화지 않는 주체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 때의 자아는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 속에 움직이면서 스스로의 일을 다스리는 원리로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일상성의 이성으로서의 프로네시스 phronesis, 프루덴티아 prudentia 또는 삶의 지혜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이것이 특정한 개인의 삶의 전략의 원리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원리이면서 모든 개인의 원리로서 보편화될 수 있다.
  
  자아 회복은 이러한 복합적인 자아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불투명하게 하는 사실의 세계로부터 자아를 구출하는 작업이다. 여러 층위의 자아의 발견과 확립은 역사적 업적으로 가능해진다.
  
  가령, 사고하는 자아, 이성적 자아는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의 업적으로 돌려진다. 과학적 이성은 서양에 있어서 근대 과학의 발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의식에 크게 기여한 것은 맑스주의이다.
  
  일상적 삶의 이성적 원리로서의 자아는 문학적 전통의 해석학적 노력에서 드러나게 된다. 여러 학문적 노력은 역사적 업적으로서의 이성이나 삶의 지혜의 담지자로서의 인간의 자기 회복에 도웅을 준다. 여기에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은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북친이 말하는 자연과 사회 속의 대면 공동체는 이러한 다층위적인 자아를 가장 단순하게 구현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보다 더 복합적인 세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러 층위의 자아 그리고 그것에 따라 열리는 부분적인 세계의 담지자로서의 인간-자신의 사실적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 또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에 있어서의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상상되는 자아와 그것을 실현하는 세계 또는 사회는 어디까지나 상상의 노작을 의미할 뿐이다.
  
  산업기술 사회의 전망
  
  상상이 그러내는 인간적 소망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과학 기술 산업 사회의 과정은 진행된다. 이것은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개체적 자아도 그것의 일부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개체적 자아의 주체성 자체가 이 과정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리고 체제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자아실현을 약속한다.
  
  비판적 자아는 단편화와 단절의 다른 부산물로서 과학 기술 산업 문명의 거대 조직에 저항할 수 있지만, 부산물로서의 한계를 그대로 지닌다.
  
  이런 비판적 자아가 대안적 체제를 생각하고 기획하는 경우 그것은 현실 속에 개입할 계기를 얻지 못하거나 아니면 체계가 가지고 있는 주제화의 기제에 침윤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적 실험을 보면, 대안은 거대 체제 속에 곧 흡수되고 그 체제화의 가속에 기여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참여정부의 무수한 프로젝트--연구와 문화의 프로젝트로부터 각종의 신도시 건설의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거대 계획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주체성 침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간 해방의 기회는 이러한 사회 발전의 동력이 그 변증법적 소진의 단계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되는 거대 체제화의 과정이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치거나 속도를 늦추게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2년에 출간된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 Limits to Growth>는 자원, 인구, 환경 오염 등의 문제로 인하여 경제 성장이 지속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경고를 처음으로 사람들의 의식에 크게 각인했다.
  
  이 보고서의 데이타들이 과장돤 것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한 시대가 지난 지금에 와서 그 경고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설사 물리적 사실로서 이 한계가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시점에서 이러한 가정 자체가 비현실인 것이지만), 무한한 경제성장은 인간성과 인간의 삶의 황폐화-외적인 변영에 감추어진 황폐화-를 가져온다. 성장의 한계는, 인간과 사회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함에 따라, 그에 대한 적응을 불가피하게 할 것이다.
  
  성장한계설에 대한 비판의 하나는 그것이 인구나 자원 그리고 환경오염을 적절하게 다스릴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발달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타당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러한 요인들의 통제가, 적어도 문제를 자신들의 생활 공간에 한정해 볼 때, 서방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가진 주장으로 보인다.
  
  환경 과학 기술의 발달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모든 발전이나 마찬가지로 이윤 창출의 동기에 이어져 있는 것이면서도, 의식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것은 지구 환경의 한계에 대한 의식이 확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의식은 보다 넓은 자원낭비적 삶의 스타일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지고, 보다 순정한 인간적인 삶에 대한 탐구에 현실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북친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너그러운 사회 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한국의 경우, 그러한 전기가 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멀리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국의 사회와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말하여, 보다 풍요한 경제를 향한 열망이다. 그 과실의 분배에 대한 치이가 정치의 좌와 우를 갈라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걱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소외가 아니다. (그것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자아실현의 장해에서 유래하는 사회적 소외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편향된 열망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선진 후진의 경쟁에서, 선진국에 대한 선망은 한국인의 자아의식의 중요한 부룬을 이룬다.
  
  이것은 한국 사회와 인간의 지배적인 담론 형성, 사회적 주체 형성의 기제인 잡단주의, 민족주의에 의하여 강화된다.
  
  그러나 선진 후진의 세계적 선망의 제체에서, 한 사회가 일단 선진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대안을 생각할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이 현실 변증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세계와 인간적 희망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새로운 전기의 도래를 완전히 배체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오로지 자기 폐쇄적인 역학 속에 움직이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비관론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새로울 것이 없는 비관론이다. 사람의 삶이 사실적 세계에 얽매어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나름의 삶을 살아 왔다.
  
  지금의 시점에서 이 얽매임이 특히 큰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얽매임의 주체가 자연조건이라기보다 사회조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통제 가능의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사회 제체의 규모만으로도 구체적인 인간의 자발성에 의한, 또는 대면민주주의에 의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러하여 권력과 조직화의 확대를 통한 통제의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것은 과학 기술과 산업화로 자연 자원의 통제가 가능하여진 것에 병행하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사실적 조건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적 통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지의 개입--구체적 인간의 자발성을 억압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개입은 작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능률의 면에서는 느린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 수롤 능률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체제의 대규모화 그리고 능율화의 기준화에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인간 사회가 인간적인 되는 것은 작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의 개성의 존중 그리고 인간의 상호 관계가 살아 있음으로서이다.
  
  "살아남은 것은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철 때문이었다"라고 쓴 작가가 있지만,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에 큰 적의의 상황 속에서도 작은 호의와 친절로 살아남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번성하는 NGO의 뒤에는 그 하나의 동기로서 개체와 개체 사이의 선의의 중요성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철학에 있어서 새삼스럽게 윤리학이 중요해지는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상황에 관계없이 구체적인 선의와 배려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지나치게 체계적인 이해는 이러한 작은 선의의 공간들을 조소(嘲笑)한다.
  
  이데올로기는 이 조소를 체계화하고 추상적인 이념에 의하여 무자비를 정당화한다. 세계의 혁명적 쇄신에 대한 믿음은 자기 확대의 의지와 결합하여 더욱 독단적인 것이 된다.
  
  작은 친절의 행동이 전체적인 상황을 혁명적으로 쇄신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나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잊지 않고 그 근거와 다양한 표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체제의 필요와 해체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역사는 조금 더 인간적인 시대를 준비할 수도 있다. 인간됨에서 출발하는 비판은 반드시 현실의 역학 속에 특정한 위치를 점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인간됨에 대한 꿈으로, 윤리적 요청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그 나름의 끈질김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체적인 상황 속에 인간적 안식처를 만들어내고 보다 밝은 전체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를 양대 축으로 하는 근대화-는 그 동안 억눌려 있던 많은 인간적 소망과 욕망을 해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새로운 체제 속에 사로잡히게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해방의 열매를 보전하명서 인간성을 보다 본연의 가능성으로 돌려 놓고 체제의 비인간적 진행을 수정하는 일이다. 이 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제의 거대화가 가져오는 비인간화이다.
  
  설사 체제의 지속이 사회 발달의 추축이 될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대 프로젝트의 강박에서 풀려나게 하고 인간적인 삶의 이상에 세심한 주의를 돌리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회적 발전의 체제는 옹호되면서도 인간주의적 해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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