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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족-파키스탄인 아빠 , 필리핀인 엄마 , 한국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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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족-파키스탄인 아빠 , 필리핀인 엄마 , 한국인 딸

석원정의 '우리 안의 아시아' <36> 다인종 가정이 편안한 사회는?

하밋은 한국어를 무척 잘하고 붙임성이 좋아 누구하고나 금방 친해지는 파키스탄인이다. 17살에 한국에 왔다는데, 친근한 관계이면서도 경기도 광주에서 일을 하느라고 얼굴을 자주 보기가 힘들었다.
  
  얼굴을 보기는커녕 한 3년간 전화 한번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다. 사무실로 찾아갈 텐데 시간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3년간 일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퇴직금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하밋은 그 사이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와 함께였다. 쉴새없이 조잘대는 그 아이는 미미하게 외국인의 피가 섞인 한국인으로 보였다.
  
  '웬 아인가?'고 물었더니, 하밋은 머뭇거렸다. 농담 삼아 '그새 결혼해서 애 생겼어? 숨겨둔 애가 있었던 거야?'라고 놀렸더니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나와 하밋이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여자아이가 하밋의 무릎에 앉아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농담할 상황이 아니구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하밋을 아빠라고 불렀지만 알고 보니 하밋이 친아빠는 아니었다. 아이의 친아빠는 한국인이었고 아이의 엄마는 필리핀 여성이었다.
  
  하밋이 아이엄마를 만난 것은 아이엄마가 옆 공장에서 일을 해서였기 때문이었고, 처음 사연을 잘 모를 때에도 어린 아이와 둘이서 살고 있는 애니라는 그 여성이 딱하게 보여서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고, 격려도 해주다 보니 서로 마음이 가고 의지하게도 되고 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엄마가 오래 전에 우리 상담소를 찾아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밋이 찾아가보라고 소개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어딘가 낯이 익었고,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보니까 한 3년 전에 나어린 필리핀 여성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이혼 관련 상담을 하러 찾아왔던 것이 기억났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그 여성의 나이가 20살인가? 21살 정도에 체격이 작은 여성이었다. 아이가 한국식 나이셈법으로는 네 살(실제는 세 살)이었는데, '저렇게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벌써 아이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들까'싶어 딱하게 여겼던 생각도 났다.
  
  애니는 17살에 한국인 남성(나이가 40을 조금 넘겼었다)과 결혼해서 한국에 왔고 딸도 낳았는데, 남편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집을 나와서 딸과 따로 살고 있다고 했었다. 애니는 남편을 무서워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 거칠어서 무서워하고 있었다.
  
  한국 국적을 이미 취득했던 애니는 남편이 이혼에 동의해주지 않으니 재판으로 이혼을 할 수 있는지와 혹시 재판비용을 도와줄 수 있는지도 물어보러 온 것이다. 그러나 애니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애니는 여전히 이혼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4년째 남편을 피해 살고 있었다.
  
  애니가 나를 찾아와서 상담하던 그 때만 해도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니었는데 그 사이 부부가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애니가 한국에 온 때가 17살, 하밋이 한국에 온 때가 17살.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 쉽게 짐작이 갔다. '애니 씨 보니까 한국에 처음 왔던 때가 생각났던 모양이구나'라는 내 말에 하밋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하밋이 더 이상 소년이 아니라 한 여자를 사랑하고 책임지기에 충분한 청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파키스탄에 있는 그의 부모는 이 일을 알고 있을까?
  
  하밋은 부모님에게 애니의 얘기를 했고, 그의 어머님은 '일단 하루라도 빨리 파키스탄으로 오라'고 성화를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퇴직금을 받으면 귀국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넉 달쯤 지나 하밋은 근로기준법상 정당하게 받아야 할 금액보다 좀 적은 액수의 퇴직금을 받았고, 그래도 하밋은 만족스러워했다. 퇴직금을 받았다며 좋아하면서 하밋은 내게 전화했는데, 나는 '그럼 이제 귀국할 거냐'고 묻지는 못했다.
  
  대개 한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는 이주노동자가 귀국하겠다고 하면 특별히 불행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체로 '잘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한국에서 살 수는 없으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귀국해서 정착할 방도를 찾아보는 게 낫다'며 격려해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격려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일가족이 모두 인종이 다른, 다인종 가족인 하밋과 애니와 그들의 딸은 파키스탄-필리핀-한국 세 나라 어느 곳이나 희망하는 곳에서 살 수 있는 건데, 이 세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이들 일가족이 몸도 편하고 맘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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