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문제가 새해 벽두부터 폭발하고 있다. 지난 14일 울산에서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 씨가 분신자살을 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서울대병원 무료간병인 소개소 소속 간병인(이하 간병인)들이 5개월째 무료간병인소개소 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중이다.
25일 오전 10시 간병인들과 서울대병원 공대위는 조속한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서울지방노동청 8층 소회의실에서 전격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프레시안은 간병인들의 그동안 투쟁과정과, 그 배경을 알고자 서울지방노동청 농성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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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에 대한 배신감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먼저, 대부분이 50대가 넘은 아주머니들인 간병인들이 지난 9월이래로 5개월 남짓 국회 앞 1인시위,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 병원 로비 농성, 일주일간의 단식 투쟁 등 강도 높은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무언가 궁금했다.
간병인 정금자씨는 자신의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간병인으로서 무료소개소가 폐쇄되기 전까지 서울대병원인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성심성의껏 일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 들 중에는 1988년 무료소개소가 생긴 이래 근 14년 동안 근무를 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병원에서도 우리 간병인들의 활동을 높게 평가해주었고, 환자분들도 저희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병원은 9월1일자로 아무런 예고 없이 무료소개소를 폐지한다고 통보해왔습니다. 달랑 폐쇄사실을 알리는 엽서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병원의 이런 대처가 자긍심을 가지고 일해 온 우리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14년 째 간병업무를 해왔다는 조옥분씨는 서울대병원에 대한 분노를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하루일당 4만5천원의 박봉으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간병일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장기간병을 맡았던 어떤 환자분은 퇴원 후 외래진료로 병원에 오면 꼭 저를 찾아주었습니다. 바깥사람들은 저희 간병인을 밑바닥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환자분들에게 격려말씀을 들을때 마다 저는 일이 보람되고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료소개소를 폐쇄하기 전까지는 병원도 저희 간병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의사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도 간병인들을 인정-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랬던 병원이 하루아침에 폐쇄하다니,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언제는 저희들보고 ‘서울대병원인’이라고 해놓고는 아무런 상의 없이 내팽겨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대 병원은 지난해 9월1일 1988년 이래로 운영해오던 무료간병인소개소를 전격 폐쇄조치했다. 물론 사전논의나 협의는 전무했다. 병원 측은 9월4일자 우체국 소인인 찍힌 우편엽서를 간병인들에게 보내 폐쇄사실을 알렸을 뿐이다.
그동안 간병인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이라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간병업무를 수행해 왔다.
조옥분 씨는 “적은 일당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고된 업무에 시달린다고 하면 남들은 그런 일을 왜 아직도 하냐고 반문합니다. 사실 1988년 서울대병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 여러 가지 장사도 하고 허드렛일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장사란 것이 기본적으로 보다 많은 이득을 남기기 위해 남을 속이는 일이더군요. 간병인 일은 비록 몸은 고되지만, 떳떳하게 돈 벌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당당하다고 생각해 10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해왔습니다”고 말한다.
***2000년, 무료소개소 폐쇄 1차 시도**
서울대병원은 지난 2000년에도 무료소개소를 폐쇄 시도를 했다가 간병인들의 강한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다. 그 때의 정황을 물었다.
조옥분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2000년 당시 무료소개소를 관리하던 간호사 분이 조만간에 무료소개소가 폐쇄된다고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간병인 2백여 명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병원측에 대응하기로 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변호사 사무실 등 여기저기 쫒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법률상 특수고용직이라 노동조합 설립에 어려운 사항이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급한대로 ‘상조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상조회 활동이 본격화되고 노조설립이 가시화 되자 병원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노조를 결성하지 말라는 압력과 함께 협상을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협상으로 병원측은 무료소개소 설립 방침을 철회하는 대신 저희들은 노조 설립 계획을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간병인들은 2000년의 투쟁은 스스로 움직이면 뭔가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전한다. 한편 비록 무료소개소 폐쇄는 철회되었지만, 상조회 등 투쟁에 나선 간병인들에 대한 병원의 차별과 압력이 노골화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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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자씨는 그후 달라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000년 무료소개소 폐쇄시도가 있기 전에는 의사선생님, 수 간호사 선생님 그리고 무료소개소 관리자 분 모두 저희들을 인정해주시고, 적극적으로 배려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2000년 사건 이후로는 모두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이전 관리자분은 환자들의 불평불만 사항을 접수하면, 일단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문제점이 있으면 간병인들이나 환자가 오해가 없도록 성심성의껏 설명해주었습니다. 설사 간병인이 실수를 했더라도 마음상하지 않게 좋은 말씀으로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새로온 관리자는 조그마한 사건만 있으면 모욕적인 언사는 물론, 시말서를 쓰라는 둥 저희가 보기에 억울한 조처를 일삼았습니다. 특히 ‘상조회’ 활동을 했던 간병인들에게는 보다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고 무시를 했습니다.”
현재 정원자씨는 지난해 10월 일주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신부전증을 앓고 있다.
***“우리가 갈 곳은 오로지 무료소개소뿐”**
지난해 10월1일부로 서울대병원에는 인력파견업체인 ‘유니스’, ‘아비니스’ 유료간병인 소개소가 들어왔다.
간병인들에 따르면, 9월1일 무료소개소가 폐쇄되는 시점 전후로 7-8개의 유료소개소가 들어왔는데, 그 중 몇 개의 소개소가 병원측 관계자와 유착의혹이 드러나 퇴출되고 새로 선정된 소개소가 ‘유니스’, ‘아비니스’다.
새로 설립된 유료소개소는 현재 일당이 5만-7만원 선으로 기존의 무료소개소보다 높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무료소개소에서 일하던 다수 간병인들은 현재 유료소개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왜 유료소개소에 들어가지 않냐고 물었다.
김귀이씨는 “유료소개소는 완전히 간병인들을 착취하는 조직입니다. 유료소개소는 가입비 조로 30만원을 받고, 월회비 5만원을 받습니다. 일이 없을 때도 월회비는 무조건 내야합니다. 월회비가 연체되면 그나마 일거리도 소개해 주지 않습니다.”고 말한다.
유료소개소 이야기가 나오자 여기저기서 불만과 불평의 목소리가 나온다.
“장기환자를 고정적으로 맡기 위해서는 정해진 회비 이외에 웃돈을 직원에게 줘야한다”
“5개월째 일거리를 안주어서 월회비를 안내었더니, 재산을 압류한다는 통보가 왔다”
“일거리를 주지 않아 다른 유료소개소를 찾아봤더니, 이전 유료소개소에서 밀린 월회비를 내지 않으면 가입시키지 않겠다고 해서 밀린 3개월 치 월회비를 지급했다”
조옥분씨는 “ 2000년 이전처럼 병원과 우호적인 관계속에 환자분들에게 격려 받으면서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노동청장님이나 병원이 유료소개소라고 회유를 하지만 우리가 갈 곳은 오로지 종전의 무료소개소입니다”고 잘라 말했다.
***“이젠 악 밖에 안 남았습니다”**
수개월 수입이 없어 카드빚 만 수백만원이라는 간병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수개월동안 노숙을 해 병을 얻었다는 간병인, 마지막으로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농성을 이렇게 고수하는 이유가 뭐냐고 어렵게 물었다.
정원자씨는 “우린 설상 병원이 물러서서 무료소개소가 다시 생긴다고 해도 다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병원 측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농성을 지속하는 건 다음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고 말한다.
조옥분씨는 “예전에 길에서 사람들이 빨간 띠를 두르고 데모하는 걸 보면, 얼마나 할 일이 없어 저러나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 당하고 보니, 이 사회가 얼마나 부당한가를 뼈 속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전 간병일이 힘들고 고되면서도 10년 넘게 한 것도 스스로 떳떳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투쟁도 너무 힘들고 고달프지만, 스스로 당당하고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끝까지 할 거다”고 말한다.
또 최정남씨는 “5개월 동안 농성을 지속하면서 지친 것은 사실입니다.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점거란 말을 들으면서 이곳에 버티고 있겠습니까? 노동청장님이 약속을 한 만큼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보였으면 합니다. 이젠 악 밖에 안 남았습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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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친 후 간병인들은 연대차 방문한 학생들에게 민중가요 ‘동지가’를 배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잘 할 수 있는데, ‘동지가’는 처음이란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간병인들을 뒤로하고, 서울지방노동청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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