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영화라도 각자가 가진 태도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감독의 의도도 개별 관객의 정서와 취향, 세계관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힌다. 누군가에는 걸작이, 다른 누군가에는 졸작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휴머니즘이 누군가에게는 이데올로기의 압박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간혹 객관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자들이 직업적 평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객관적 관점'이라는 이율배반을 강요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화보기에 객관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작으로 선정한 <집결호>도, 그런 면에선 예외가 아닐 것이다. 중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팀의 특수효과 지원 등의 수사로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영화는 관객, 특히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 있는 남한 관객들에게 꽤 복잡한 중층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답할 것인가, 전쟁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뒤로 하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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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호 |
<집결호>는 알려진대로 1948년의 국공내전이 배경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는 장개석의 국민당 세력을 몰아내려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시점을 채택하고 있다. 압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중국 공산당의 대의를 위해 몸이 두 동강 나고 팔 다리가 잘려 나가는 살벌한 전투에 나선 혁명 열사들, 그 가운데 신념에 불타는 중대장 구즈더가 이끄는 46명의 전사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집결호라 불리는 퇴각 나팔 소리를 기다리며 적의 전진을 저지하려다 중대장을 제외한 채 전원 전사한다. 어찌된 일인지 전쟁이 끝난 뒤, 부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확인이 안된다. 누군가는 영웅이 됐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 그들은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현실에, 유일한 생존자인 중대장 구즈더는 치를 떤다. 퇴각 나팔 소리를 듣지 못해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 넣었다는 죄책감과, 목숨을 대가로 혁명을 사수한 그들이 열사로 불리지 못하는 데 대한 억울함이 그를 이끈다. 그는 부하들과 치른 마지막 전투 현장에서 미친 듯이 땅을 판다. 이 영화를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편리하게 해석한다면, 너무 상투적인 게 될 것이다. 감독은, 어떤 가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그들이 그 가치의 연장선에서 마땅히 호명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혁명의 진정한 정신이며, 그들 하나 하나를 기억할 때 혁명은 완성된다는 얘기렸다. 이 영화를 단순히 실존주의적인 휴머니즘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칠게 말하면, <집결호>는 <배달의 기수>의 중국판이다. 후손들에게 해방 중국을 안겨준 그들을 기억하라는, 이 이데올로기적 감성 영화 앞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헌데, 훨씬 앞서 그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서서 똑같은 희생을 치렀던 우리는 그의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쟁의 상흔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가치 운운하는 것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게 가장 마음 편한 일이 될 것이다. 흔한 방법대로, 한국의 우수한 스탭들이 참여한 덕에 전투신이 볼만했다는 식의 비주얼 칭찬으로 이 '사실상 빨갱이적' 영화에 대한 어정쩡한 관점을 봉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혼란은 남는다. 중국영화 <집결호> 자체가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시공간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 <집결호>는, 내게 이 혼란을 수습할 언어를 개발해 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 게을렀던 나로선, '다양성에 대한 문화적 포용'이라는 상투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 단어라도 붙들고 있으니, <집결호>를 보며 얻었던 꽤 묵직한 감동에 그럭저럭 알리바이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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