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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남북공동선언엔 '6.15'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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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남북공동선언엔 '6.15'가 없다

[정상회담]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다시읽기

2007 남북정상회담을 정리하는 합의문서가 4일 발표될 예정이다. '남북관계 발전 평화번영 선언'이라는 이름의 이번 합의문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민족공동번영을 위한 경제협력, 남북 화해협력 사업 등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가 담길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문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1차적인 토대는 2000년 정상회담에서 나온 6.15남북공동선언이다.

따라서 새로 발표될 합의문의 의미와 진전 내용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6.15선언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이에 6.15선언의 조항과 그 의미를 짚어본다.
▲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4일 오후 11시 20분 김대중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6.15공동선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북공동선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전문(前文)에는 정상회담의 의의가 들어갔다. 남북간 합의서에 상호 국호를 사용한 것은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부터로 6.15선언에는 '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직함을 통해 상호 체제인정의 정신을 재확인했다. 선언의 공식 명칭에는 '6.15'라는 날짜가 없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 1항은 통일의 원칙을 밝혔다. 남북 합의문에 '자주'가 처음 들어갔던 것은 1972년 7.4공동성명이었다. 7.4공동성명의 '자주'는 '외세 의존과 간섭 배제'한다는 의미로 '반미적 배타성'이 강했으나, 6.15선언의 자주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라는 수식어를 넣음으로써 배타성을 배제하고 민족 내부적인 결속을 강조했다. 남측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북미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둔 북측의 포석이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통일 과정에 관한 조항이다. 남측의 연합제는 1989년 노태우 정부에서 발표하고 국회의 승인을 언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나온 것으로 교류협력의 1단계를 지나 남북 연합기구(정상회의, 각료회의, 평의회)를 만드는 2단계를 말한다.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는 1989년 방북한 고(故) 문익환 목사와 김정일 주석의 협의에 따라 탄생했다고 알려진 것으로 1991년 북한 신년사에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으로 처음 등장했다. 사실상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평가되고 통일의 1단계에서는 남북 양 정부의 군사·외교권을 인정하고 있다.

2항은 또 연합기구를 당장 만드는 대신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함으로써 북한이 연방제를 사실상 포기하고 '단계적인 통일' '과정으로서의 통일'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평가된다. 두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 통일로 과는 과정인 '화해협력' 중 '화해' 문제를 다뤘다. 이산가족 문제를 시급해 해결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까지 포함하자는 김정일 위원장의 역제의를 동시에 담았다. 이에 따라 그해 8.15에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고 9월 2일에는 남쪽에 살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명절과 기념일을 전후로 개최됐고, 2005년에는 화상상봉이 처음으로 시작됐다. 이후 남한에서는 국군포로·납북자 문제가 적극 제기되기 시작했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 평화, 통일, 교류협력이라는 회담 3대 의제 중 교류협력, 즉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에 관한 내용이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철도·도로 연결이라는 소위 '3대 경협'을 추진하는 근거가 됐다. 남북경협은 노무현 정부 들어 북측의 지하자원과 남측의 경공업 원자재를 교환하는 유무상통(有無相通.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환함) 방식의 '신경협'으로 이어졌다.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로 나아가자는 '기능주의적 접근'은 남측의 아이디어다. 북측은 이 조항에 합의함으로써 연방(혹은 연합)국가로 가기 전에 교류협력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 어느 정도 수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총 5항 중 북측이 중시하는 통일 관련 조항을 상위에 배치하고 교류협력 조항을 하위에 둠으로써 균형을 맞췄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합의문을 발표만 해놓고 이행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남북합의의 제도화를 규정한 조항이다. 남북장관급회담과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차관급) 회담 등으로 현실화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번호가 달린 조항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식 의제에 포함될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약속 불이행에 따른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한 묘수로도 해석된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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