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자 애니 프루는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역작 <시핑 뉴스>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 있다. "물이 빛보다 먼저 생겼을 수도, 뜨거운 염소 피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깨질 수도, 화산이 차가운 불을 뿜어낼 수도, 바다 한가운데에 숲이 나타날 수도, 게 위로 손만 가져가도 그 손그림자에 게가 잡힐 수도, 매듭 속에 바람이 갇힐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그러므로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어쩌면 고통과 불행이 함께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은 상처를, 마침내 찾아올 권태를, 그리고 이별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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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그런데도 사람들이 또 그 지긋지긋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온몸이 사랑의 감정에 달뜨기 시작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전에 받았던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는 기적, 누군가가 무작정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지는 기적, 그 찰나의 기적에 거역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허진호의 영화 <행복>은, <봄날이 간다>나 <외출> 등 그의 전작들이 고수해오던대로 고통과 불행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봄날은 간다>에서 일갈했듯, 사랑은...변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남녀 주인공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깊이 패인 상처 때문에, 혹은 지금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존재의 끝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다. 사랑이 싹트는 순간의 기적에 대항할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감에 만취된 그들 역시,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이 가끔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잔인한 이별의 순간은 어김 없이 찾아온다. 허나 영화 <행복>에 방점이 찍히는 지점은, 이별이 아닌 것 같다. 허진호는 두 남녀가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유별날 정도로 행복한 표정에 집중한다. 사랑 때문에 상처 받고, 사랑 때문에 치유받고, 또 다시 그 사랑 때문에 상처 받는 게 인간사라면, 이번에 그는 치유의 순간에 피어나는 절정의 행복을 묘사하는 데 더 많은 애정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 결혼한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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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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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있어서 사랑은 잔인한 행복이다. 그런데, 그것도 행복이다. 은희(임수정)는 영수(황정민)에게 용감하게 말한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 어떻게 되든."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지금 벅차게 행복을 껴안는 은희야말로,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다. 그래서 나는 이별의 순간에 시골길을 내달리며 울부짖는 은희의 처연함보다, 수줍고도 달뜬 표정으로 영수의 입맞춤을 맞이하던 그 눈부신 미소가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 눈에 밟혔다. [그래서 영화가 볼만 하냐는 얘기냐고?]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봄날은 간다>와 <외출>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친절하게 빠진 영화라서, 오히려 살짝 신파적이라는 냄새까지 풍긴다. 어떤 면에서 그동안 봐왔던 허진호의 색깔이 약간 탈색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좋게 말하면 그도 성숙한 것일 수도 있다. 대중영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가을에 볼만한 꽤 괜찮은 멜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황정민과 임수정의 연기도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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