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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변>, 좌절한 386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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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변>, 좌절한 386의 고독

[핫피플] 연극무대 선 문성근 인터뷰

문성근 이 사람 요즘 외로움이 철철 흐른다. 1시간 반짜리 무대에서 막 내려 온 그는 지금 땀이 범벅이다. 갑자기 측은해진다. 불현듯 그도 이제 늙고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마음이 늙고 있다. 한때 문성근이라면, 혹은 문성근만큼은 늙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열혈의 청년동지 같은 문성근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삶에 지치고 배반당하는 건 인생사 모두가 다 같은 얘기다. 하지만 문성근만큼 파란만장하게 그 과정을 겪은 사람도 드물다. 문성근은 한때 우리의 사회와 정치를 바꾸겠다며 피를 토하듯 거리를 다녔다. 물론 그 덕분에, 세상이 바뀌긴 했다. 하지만 완전히, 무엇보다 제대로 바뀌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안한 것만 못한 일이 된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그 판'에 아예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에 빠져나왔어야 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럴 수가 있었을까? E.H 카나 에릭 홉스봄 같은 역사학자가 들으면 경을 칠 일이다. 역사에 있어 '...했다면'이라는 가정법은 통용될 수 없으니까. 문성근에게 있어 '그 일'은 마치 숙명처럼 치러야 할 홍역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성근 ⓒ고양문화재단 www.artgy.or.kr
어쨌든 그는 '그 일'을 호되게 치른 후 홀연히 은막과 무대로 돌아왔다. 2005년과 2006년, 그는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듯 '미친듯이' 영화에 출연했다. <한반도>에선 좀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마도 문성근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작품이 좀 아니긴 했으나 <퍼즐>에서의 캐릭터는 나쁘지 않았다. 문성근은 이상하게도 영화 속에서 야비할 때가 어울린다. '그것이 알고싶다'의 오랜 이미지를 확 무너뜨릴 때 비로서 그의 제 맛과 제 값이 느껴진다. 하지만 진짜 좋았던 건 <수>때였다. 영화는 최양일 감독이 정말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 속에서 문성근만큼은 정말 빛이 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영화는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전혀 보지 못한 영화, 아직 개봉을 하지 못한 영화 <작은 연못>도 그의 최신 출연작이다. <작은 연못>에서 문성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걸 알려면 요즘 그가 한참 땀 범벅이 되고 있는 연극 <변>을 보면 된다. 변. 변 사또의 변. 춘향이가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묘한 춘향전의 이야기. 변 사또가 계속해서 춘향이를 외쳐 부르는 이상한 연극, 의도적으로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낸 난장판 연극. 그 속에서 문성근은 다시 한번 빛이 난다. 내친 김에 연극 얘기 한번 할까. 프리미어가 연극 얘기 좀 하면 어때.(*이 글은 영화 격주간지 '프리미어' 9월15일~9월30일 호에 실린 글임-편집자) 그래 연극 얘기 좀 하자. 성균관 출신이라는 변 사또의 부임을 앞두고 이방 호방 등 6방과 그의 계집들은 한참동안 난장을 부리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이 놈의 신임 사또, 또 어떤 괴물일까. 자기들과 아삼육만 맞으면 수탈의 강도를 조금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치와는 달리 변 사또 이 인간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인간이다. 기생들의 갖가지 요란한 신고식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줄기차게 찾는 이 있으니 그게 바로 춘향이다. 변 사또는 6방에게 계속 이른다. 춘향이를 데려 오너라. 하지만 춘향이는 끝내 오지 않는다. 일부종사, 오로지 이몽룡에게 마음을 주겠다는 말만 계속 전할 뿐. 낙담하고 좌절한 변 사또는 자신이 데려 온 측근 '비방'과 함께 술이 떡으로 취해 6방과 계집들을 하나하나 요절을 낸다.
연극 <변> ⓒ고양문화재단 www.artgy.or.kr
연극같기도 하고 연극같지도 않은, 그래서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보이는 연극 <변>은 초장에는 도통 대사를 알아 먹을 수가 없다.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중앙에 마련된 긴 탁자를 오가며 배우들은 힘주어 떠들지만 그나마 그 배우가 이쪽을 향해 있을 때나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있고 저쪽 관객들을 향해 있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거이 뭐 이 따위야,하는 생각이 들 때쯤 불현듯 이 연극은 무슨 소리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갑작스런 깨달음 같은 것이 생기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서 무대위 난장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건 난장판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극이 아니라 연극이 난장 그 자체라는 것을 애기하는 작품이다. 거기서 문성근의 모습이 점차 가슴을 후려친다. 엉망으로 취한 문성근, 곧 변 사또가 춘향이를 구슬프게 부를 때 그건 꼭 춘향이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변 사또가 부르는 춘향이는 그가 성균관 시절 그토록 꿈꿔왔던 이데아 같은 존재다. 연극 속 변 사또는 과거 순수했던 이념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지금의 변절에 좌절한, 이 시대 386 지식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인 것이다. 왜 이상우 연출가가 문성근을 캐스팅했는지 그때쯤 되면 무릎을 치게 된다. 맞다. 좌절한 지식인. 한때 시대를 바꾸겠다고 나섰지만 이제 스스로 변절의 길에 들어선 '못난' 지식인의 초상이야말로 요즘 같은 때 문성근이 아니고 그 누가 연기할 수 있겠는가. 술에 취해 비틀대며 춘향이를 찾는 문성근이 모습에서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는 건 그때문이다. 못난 사람같으니. 지질이도 못난 사람같으니. 문성근이 요즘 푹 빠져있는 일은 산을 타는 것이다. 그는 정말 최근 1년 사이에 줄창 산을 탔다. 처음엔 극작가 김운경 씨를 따라 다녔다가 거기서 홀로 떨어져 자기 '계보'를 꾸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를 따라 다니는 '산악인'이 어림잡아 30여명이나 된다. 월요일과 금요일에 산을 다닌다 해서 '월금산악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열심히 열심히 산을 다닌 때문인지 그는 6Kg 정도를 감량했다. 얼굴 볼 살이 홀쭉해졌다. 그래서일까. 연극이 끝나고 술집에서 막걸리를 자작할 때 술잔에 그의 얼굴 음영이 깊게 떨어진다. 가뜩이나 요즘 외로워 보이는 이 사람이 더욱 외롭고 쓸쓸해 보일 때가 바로 이때다. 연극을 보고, 같이 한 잔을 하면서, 가볍게 인터뷰를 하자고 했을 때 그가 유일하게 조건을 걸었던 것은 '다른' 얘기는 하지말자는 것이었다. 영화와 연극 얘기만 하자는 것이었다. 산을 타는 이유가 마음 속 분노를 누르고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라는 '억측' 기사 같은 건 쓰지말자는 것이었다. 심지어 미루어 짐작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걸 영어로 얘기하면 돈 이븐 씽크 어바웃 댓이 되겠지. 그래서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대사량이 너무 많아 놀랐다,는 시덥잖은 얘기만 나눴다.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그는 그날 술을 참 많이 마셨다. 예전엔 술을 그렇게까지 마시던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이 많을 것이다. 아 참, 미루어 짐작하는 생각 따위 아예 없애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연극 <변> ⓒ고양문화재단 www.artgy.or.kr
문성근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번 연극 <변>을 보면 이 사람이, 천부적인 연기자는 아닐지 모르겠으나, 천성이 연기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는 배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 문성근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찍고 연극무대에 설 수 있도록 마음 속에서 지지해줘야 한다. 1953년생인 그는 이제 50을 훌쩍 넘겼다. 명계남 이창동 박광수 여균동 등 여전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그와 동년배거나 한둘 아래들이다. 영화가 아무리 젊은 '것'들이 주로 향유하는 것이라 한들, 영화의 권력은 여전히 50대 노병들이 잡고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만 이제는 예전처럼 그 파워가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천만에 노병은 잘 죽지 않으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문성근 같은 노련하고 경험많은 배우를, 상업성이 없다고 캐스팅을 꺼리는 프로듀서들은 저주받을지어다. 너무 심한 말이 아니냐고?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춘향이를 부르며 절규하는 문성근의 고독한 하이에나의 몸짓을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보라고 하는 건 바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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