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회장이 여수 세계박람회의 명예위원장으로 위촉됐다는 것이 신문에도 많이 나서 심리적인 압박을 받았다. 여수박람회 유치에 노력해 달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서울고법 형사10부 이재홍 수석부장판사의 말이다. 특정 사건에 대한 사법 심사가 '여론 재판'이 돼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관은 결코 여론에서 자유롭지 않음이 정 회장 항소심 선고에서 나타났다.
우리 사회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대한 사법부 비난 여론과 함께 '재벌 총수에 대한 실형 선고로 국가 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두 가지 여론이 분명 존재한다. 다만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헌법 103조)'한 결과는 '국가 경제 위기론'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정 회장에게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 약속한 사회 공헌에 진력해달라"고 당부하는 한편 "저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실형 선고로) 우리나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을 하기 꺼려졌다"고도 말했다. 법원이 '정 회장 실형=국가 경제 위기'를 단정한 셈이다.
재판부는 다만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하며 사회공헌 약속 준수, 경제단체에서의 준법 강연, 경제전문잡지 기고 등을 정 회장에게 주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1심에서 인정한 유죄 혐의를 대부분 인정하고 형량도 1심에서와 같이 징역 3년으로 유지하는 등 범죄 혐의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사정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 사회공헌' 등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재판부가 각오했듯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을 비켜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혁연대 "돈 앞에 무릎 꿇은 사법정의"
판결 직후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는 '돈으로 산 집행유예, 돈 앞에 무릎 꿇은 사법정의'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재판부의 집행유예 선고를 맹비난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법원의 이번 판결이 지배주주나 전문경영인의 범죄행위에 대해 징벌적 효과가 거의 없는 집행유예 선고를 되풀이함으로써 결국 '반기업적·반시장적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사법적 규율 기능을 사실상 방기하는 기존의 관행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며 "법원이 판결문에서 어떠한 수사(修辭)를 동원하여 합리화했든 간에, 이번 집행유예 선고는 실제로는 정몽구 회장의 재력으로 이루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경제개혁연대는 특히 이번 집행유예 판결이 다른 재벌들에게 기업범죄에 대한 '엄벌 의지'가 아닌 '선처' 선례를 남겨 왜곡된 판단을 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현대자동차그룹은 그룹의 모든 역량을 오로지 총수의 집행유예 선고에만 집중해왔고, 이러한 선택이 사회적으로나 그룹 자체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전략"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또 다시 잘못된 판결 관행을 반복함으로써 현대자동차는 물론 여타 다른 재벌에게까지 '총수의 안위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왜곡된 유인구조(incentive)를 심어주었다"고 비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또 "법원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요약되는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항변할 것인지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고 덧붙였다.
이들은 정 회장과 함께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김동진 부회장과 지난 7월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된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을 비교하며 "정몽구 회장에 대해 무리하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려다 보니 전문경영인인 김동진 부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 부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받은 정대근 회장은 실형을 선고하고 구속했는데, 정대근 회장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회사에 손해를 끼친 김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 자체가 법원 스스로 양형의 형평성을 어긴 판결이라는 주장이다.
정 회장의 1조원 사회 환원 약속도, 정 회장이 생색낼 정 회장의 개인 돈이 아니라 회사 돈이라는 것이 경제개혁연대의 주장이다. 경제개혁연대는 "글로비스를 통해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취한 부당이득은 원래 현대자동차 등의 계열사와 그 주주들에게 귀속되었어야 할 이득으로 전형적인 회사기회의 유용"이라며 "만약 회사에 반환하지 않고 공익재단 출연 등의 편법으로 이 문제를 우회하려고 한다면, 경제개혁연대는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적절한 법적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제개혁연대 논평: '돈으로 산 집행유예, 돈 앞에 무릎 꿇은 사법정의' 전문보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