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서울본부 강당. 목소리의 주인공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었다. 국제민주연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지 3일째 되는 이날, 시민·사회단체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은 이미 이랜드 농성 현장과 경기도 과천 노동부를 방문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한국인 사업가들이 현지 노동자를 상대로 저지르는 횡포는 이미 국내에서도 수차례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 설립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해고되고, 파업 농성장에 있던 이들은 회사 경비원들에게 납치됐다. 끝내 노동자들이 단체 협상을 요구하면 회사는 어느새 폐업 신고를 하고 자취를 감췄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5명의 필리핀, 인도네시아 노동자와 노동운동가, 변호사는 이 같은 현지 한국 기업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노동 탄압 문제제기 하면 회사명 바꿔 영업한다?
필리핀의 '가비테' 지역은 필리핀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외국 자본에게 각종 세제 혜택을 주며 기업을 유치하고 있는 경제특별구역(Special Economic Zone)이다. 한국을 찾은 머를린 씨와 플로리 씨가 각각 일을 '했었던' 한국계 기업 필스전(Phils-Jeon)과 청원패션이 자리잡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2004년 청원패션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노조를 설립했지만 회사는 노조를 부정했다. 2006년 9월 노조가 단체 협상을 촉구하며 평화적인 피켓라인(Picket Line)을 만들고 시위를 진행했다. 그러나 경찰과 용역경비 직원들이 폭력을 행사했고 이후 폭력적 해산 시도가 계속됐다. 노동자들은 농성장 출입이 금지됐고 경제특별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도 압수당했다. 음식이나 유조차도 반입이 금지됐다." (플로리 씨)
1990년 필리핀에 설립된 청원패션은 의류업체이며 GAP 등을 유통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노조가 설립된 2004년부터 지금까지 노조는 끊임없이 단체협상을 요구하고 필리핀 노동부와 노동법원 역시 이들을 배타적 단체협상권을 가진 노조로 인정했음에도 사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2006년 8월 노조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찰과 용역직원은 노동자들이 설치한 천막을 철거하고 파업 노동자를 해산하면서 40명 이상의 노동자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청원패션은 물건을 납품하는 월마트 등이 문제를 제기하자 '청우무역'으로 회사 이름을 바꿔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간사는 서울에 있는 본사를 방문했으나 더욱 황당한 일을 마주쳤다. 바로 몇 주전 8월 말에 채권단 회의를 거쳐 회사를 부도처리하고 잠적했다는 이야기를 빌딩 경비원에게 들은 것이다. 사장은 전화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가비테 경제구역에서 한국 기업 노동자를 조직하고 있는 노동자지원센터 (Workers Assistance Center. WAC) 활동가 세실 씨는 "우리는 그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앞두고 잠적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며 "실제 필리핀 공장은 잘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파업하면 해고하고, 납치하고…
"필스전의 모기업은 한국에 있다. 사측은 노조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농성 중인 노조원들을 폭력적으로 해산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여성은 카메라를 뺏으려던 용역 직원에게 맞아 유산을 했다.
이런 일이 있어도 필리핀 정부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부와 사측은 이미 한통속이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머를린 씨)
역시 필리핀 가비테 지역에 있는 의류업체 '필스전'은 (주)일경이 설립한 현지 법인이다. 이곳에서는 2004년 노조 등록선거를 거쳐 노조가 설립됐지만 회사는 단체협상을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필리핀 지역노동위원회는 필스전 노조를 합법노조로 선언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2006년 8월 29일부터 3일에 걸쳐 회사는 노조원 63명을 해고했다. 같은 해 9월 노조는 합법적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원들은 복귀하거나 대부분 해고를 당했고 현재는 소수 지도부만이 공장 앞에서 농성 진행중이다.
지난 8월 5일 새벽에는 필스전 공장 앞 농성장에서 자고 있던 여성 노동자 2명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괴한 10여명이 테이프로 팔다리를 묶고 눈을 가려 트럭에 태워 고속도로 변 웅덩이에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최저임금만 지급하다가 부도 내고 사라지는 기업들
"인도네시아 빅토리아에 있는 의류공장에서 7년간 일을 했다. 그런데 회사가 한국 사업가의 손에 넘어간지 2개월만에 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해고 당했다. 이후 지금까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수하르토 씨)
인도네시아에 한국 자본이 대대적으로 진출한 시기는 1980년대 경이다. 수하르토 정권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 정책 아래 한국 업체들은 대규모 공장을 건설했다.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통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한국에 세번째로 큰 규모의 해외투자국이며 2007년 현재 570개 회사가 진출해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들 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복지수준은 매우 낮다. 근로시간에 상관없이 최저임금만을 지급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으며 건강보험과 같은 기초적인 복지도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노조 설립을 철저하게 가로막는가 하면 어느날 갑자기 부도를 내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증언이다.
"우리의 희망은 한국인들의 연대와 지지에 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을 더욱 허탈하게 만든 것은 한국인 사업자들의 이 같은 횡포를 규제하는 기관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적으로 현지 상황이 불리하다. 경제특별구역으로 지정된 필리핀 가비테 지역은 해외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No Union, No Strike'(무노조, 무파업) 정책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노동운동가들은 지난 몇년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 살해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역시 노동운동의 여건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보다 '선진국'이라는 한국 정부조차 이 같은 상황에서 발뺌하는 모습은 자국 정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이 지난 3일 만난 노동부 관계자는 "한국에서 이뤄지지 않은 일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비공식적으로 모기업에 권고할 수는 있겠지만 이를 따르는 건 사업주가 선택할 문제다"라고 답했다. 또 "조사한다면 외교통상부와 주재 대사관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이라고도 답했다.
그러나 현지 주재 대사관을 거쳐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이들 노동자들에게는 '불가능한 해법'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수차례 대사관을 방문했지만 한국 대사관 측은 "여기에 우리가 와 있는 이유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노동자가 아닌 한국 자본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이제 이들은 한국 노동자 및 시민단체와 함께 보다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국제민주연대는 3일 산업자원부 투자정책과에 필스전과 청원패션을 OECD 가이드라인 위반으로 제소했다. 다국적 기업에 현지 법 체계를 준수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OECD 가이드라인은 구속력이 없긴 하지만 현재로선 해외 진출 기업 경영에 대해 유일하게 나와있는 지침이기도 하다.
"한국 사업가는 밉지만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노동자들이 어렵게 투쟁하고 있는 건 똑같은 것 같다"며 웃음짓던 이들. 간담회를 마치며 한국인들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연대가 절실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분명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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