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 기시감. 최근 개봉된 일련의 외화들을 보면 떠올리게 되는 단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와 데이빗 핀쳐의 <조디악> 그리고 라이언 필립과 크리스 쿠퍼가 주연을 맡은 <브리치>같은 작품들. 그렇다고 이 영화들의 내용이 모두 어디선가 본듯한 얘기들을 비슷하게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들은 각기 전혀 다른 얘기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걸까. <폭력의 역사>는 우리가 얼마나 폭력의 순환성 한가운데 놓여 있으며 폭력적인 사건에 얼마나 자주,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개입할 수 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폭력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폭력은 결국 폭력으로 계속해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폭력의 일상성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폭력의 일상화는 9.11 이후 전세계에 만연돼 있는 테러의 공포와 무관치 않은데 주인공처럼 일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애썼던 현재적 삶의 가치가 완전히 붕괴되며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이며,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 가도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부시 정부이후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듯이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기생명력을 가지고 운행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모두가 다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영화 <폭력의 역사>는 치밀하게 증명해 낸다. 크로넨버그는 바로 그 같은 비교적 큰 이야기, 거대담론을 미국 인디애나주의 작은 마을, 곧 하나의 小우주를 통해 차근차근 설명하고 공명케 하는데 성공했다. <폭력의 역사>가 나름 중요한 영화라고 하는 것은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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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과 <브리치> 등은 <폭력의 역사>와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들이다. <조디악>은 1969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살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살인이긴 살인이되 살인에만 극명하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이 살인행위를 좇는 세명의 남자 이야기에 더 힘을 주고 있어 흥미를 끈다. 흔히들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고 부르는 이 영화는 가공할 폭력이 어떻게 시대를 짓눌렀고, 또 그 반대로 억눌린 시대의식이 어떻게 해서 엽기적인 폭력을 불러왔는지를 고찰한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경유하며 월남전과 워터게이트를 겪었던 미국사회는 한 시대의 종언, 종말을 맞게 되는데 데이빗 핀처가 생각하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새로운 시대는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의 답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속의 살인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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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치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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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약 40년전 얘기를 그린 <조디악>과 近과거의 얘기를 그린 <브리치>는 내용적으로 소통하는 바가 있다. <브리치>는 2002년에 폭로됐던 FBI 요원 로버트 핸슨의 스파이 사건을 그린다. 이 영화 역시 미국사회의 진정한 적은 누구인지, 그래서 궁극적으로 미국사회 저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이중의 의식, 그 폭력성의 실체는 무엇인지를 헤집는다. 핸슨은 체포되기 직전, 자신을 잡으러 온 옛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때문에? 다른 의미의 애국심때문에? 천만에? 내가 좇는 조직 내 스파이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짜릿한지 알아?" 할리우드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적인 건 이런 작품들 때문이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요즘 이런 작품들은 단관상영되거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사라지기 일쑤지만. 남들이 <디워> 얘기할 때 이런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할 것이다. 그건 당신 얘기일 뿐이라고? 직접 영화들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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