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드라마 <튜더스>시리즈가 첫번째 시즌을 마쳤다. <매치포인트>로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가 연기하는 헨리8세는 영국 튜더왕조의 굴곡많은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조차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헨리 8세의 이미지는 한스 홀바인의 초상화에서 봤던 뚱뚱하기 짝이 없고 포악해 보이기까지한 모습이다. 그것에 비한다면 리스 메이어스의 헨리 8세는 날렵하고 섬세한 외모에다 강인한 눈빛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성영화시절부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을 통해 울궈먹을대로 울궈먹은 소재인 헨리8세와 앤 볼린의 러브스토리가 21세기의 시청자들에게 새롭게 다가온데에서는 역시 주연배우 리스 메이어스의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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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와 여인들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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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시리즈의 인기를 타고 관련서적도 출간됐다. 출판사 루비박스가 최근 펴낸 '헨리 8세와 여인들(1,2)'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 앨리슨 위어(56)는 영국의 튜더사 전문 전기작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삶',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런던탑의 왕자', '무고한 반역자'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헨리 8세와 여인들'은 작가의 91년도 작품이다. 요즘 숱하게 쏟아져나오는 이른바 팩션에 식상함을 느낀 독자들에겐 딱 알맞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인 헨리 8세의 치세와 그의 기구했던 여섯 아내들의 삶을 꼼꼼하게 파헤친 대중 역사연구서인만큼 정보가 풍부한데다가 읽기에도 부담없는 눈높이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로 하여금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게 만들고, 영국은 물론 전유럽을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었던 앤 볼린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헨리 8세는 그토록 사랑했던 앤 볼린을 왜 야멸차게 버리는데 그치지 않고 단두대 위에 세웠던 것일까. 그는 볼린의 죽음을 전해듣고 과연 눈물을 흘렸을까. 볼린 이후에 그가 거느렸던 4명의 아내들은 어떤 운명의 길을 갔을까. 이런 궁금증들에 대한 해답이 '헨리 8세와 여인들' 속에 모두 담겨있다.
. ◆ 책으로 만나는 '천년의 스캔들' 책은 헨리8세의 왕자시절에서부터 시작된다. 형의 정혼자였던 아라곤의 공주 카탈리나(캐서린)와 결혼한 헨리 8세는 즉위한 후 똑똑하고 정열적이며 정치적으로 야심많은 젊은 군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훗날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것과는 정반대다. 첫번째 결혼생활의 초기엔 의외로 부부사이가 다정했던 것으로 작가는 기록하고 있다. 카탈리나는 헨리 8세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짧은 동안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움으로 왕실 안팎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임신, 출산과 사산을 번갈아 치르느라 카탈리나의 외모는 급격히 시들어가게 됐고, 헨리 8세는 숱한 여성들과 연애를 벌인다. 왕비는 국왕이 자신의 시종 중 한 사람이었던 앤 볼린과의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이번에도 지나가버리는 한때의 바람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왕비는 앤 볼린이 다른 여성들과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앤 볼린에 대한 앨리슨 위어의 시각은 다른 작가들의 것과 비슷하다. 자그마한 체구와 깜찍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명석한 머리를 가진 볼린은 어떻게 하면 왕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왕이 자신을 왕비의 자리에 앉혀놓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란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식 아내가 되기 전까지는 결코 몸을 허락할 수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면서도, 왕이 화를 낼 때쯤이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는 '애간장 녹이기 작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순정을 다바쳐 남자를 사랑하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으며, 야심으로 똘똘 뭉친 여성이었다. 게다가 재치와 위트,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궁정을 드나들며 갈고 닦은 춤솜씨와 패션감각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는 여자들만 알아왔던 헨리 8세에게 앤 볼린은 전혀 다른 종류의 여자였으며, 곧 정절과 높은 도덕심의 소유자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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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 ⓒchcgv.com |
헨리 8세가 교황청과의 결별을 비롯해 첫번째 아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기 위해 지루한 법정싸움 등을 벌이고 있는 동안 볼린이 기다린 세월은 햇수로 무려 7년. 이 기나긴 시간동안 볼린이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지 않은 채 바람둥이 헨리 8세를 애정의 끈으로 묶어놓고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명민하고 용의주도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볼린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지나치게 명석한 두뇌와 성마른 성격이었다. 첫 구애를 받은지 7년을 기다린 끝에 1533년 볼린은 드디어 헨리 8세의 아내가 되는데 성공한다. 결국에는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볼린은 결혼을 하자마자 자신에게 더 이상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유일한 돌파구는 왕자를 낳는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혼한지 불과 3년만에 헨리 8세의 사랑은 다른 여성으로 옮겨갔고, 그는 앤 볼린과의 결혼도 무효화시키기 위해 불륜죄를 덮어씌운 다음 런던탑에 수감시켰다가 참수시켜버린다. 저자는 헨리 8세가 이 기간동안 볼린에게 보인 유일한 애정은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노련한 참수전문가를 데려왔었다는 사실뿐이라고 말한다. 볼린의 죽음이 전해진 날 왕은 연회를 즐기며 유난히 명랑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후 헨리 8세는 네번 더 결혼했다. 세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와의 결혼은 왕자출산(에드워드 6세)의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으로 끝났고, 네번째 아내 클레브스의 안네와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혼했으며, 다섯번째 캐서린 하워드는 앤 볼린과 똑같은 간음혐의를 씌워 참수시켜버렸고, 마지막 여섯번째 캐서린 파와는 결혼한지 3년만인 1547년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이 중 헨리 8세가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누구일까? 저자 앨리슨 위어는 헨리 8세에게 아들을 안겨주었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왕실안팎에서 존경받았던 세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 ◆ 왜 튜더인가 영국 왕조 역사 중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아온 왕조를 딱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튜더왕조를 꼽을 수 있겠다. 15세기말부터 17세기 초까지의 튜더왕조만큼이나 극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때도 드물기 때문이다. 장미전쟁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를 시작으로 헨리 8세의 격동기, 에드워드 6세의 짧은 통치, 튜더왕조 최초의 여왕이자 즉위 9일만에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았던 비운의 17세 소녀 제인 그레이, 그리고 피의 메리 통치기를 거쳐,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는 역사는 영광과 오욕, 음모와 살인, 사랑과 배신이 뒤덤벅된 한 편의 대하드라마였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 때 꽃피운 찬란한 영국 문학과 예술은 400년이 넘은 21세기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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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인 러브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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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만큼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튜더시대를 소재로한 예술작품들도 부지기수다. 20, 30년대 무성영화시절 독일에서 제작된 <안나 볼린>을 시작으로 베티 데이비스의 명연기로 기리 기억될 55년작 <처녀여왕 엘리자베스1세(원제는 버진 퀸)>, 69년 쥬느비에브 뷔졸드와 리처드 버튼 주연의 <천일의 앤>과 프레드 지네만 감독의 <사계절의 사나이>, 헬레나 본햄 카터가 비극적 소녀여왕으로 데뷔했던 86년작 <제인 그레이>,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자 적수였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로 열연한 71년작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존 매든 감독의 98년작 <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이 튜더시대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들. 이밖에 TV 시리즈까지 치면 튜더 소재 작품의 숫자는 엄청나다. 심지어 흑백TV시절 국내방영돼 어린이들로부터 크게 인기를 끌었던 월트 디즈니 드라마시리즈 <왕자와 거지>도 헨리 8세와 메리 여왕 사이에 끼여 단명한 에드워드 6세의 소년시절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이 드라마는 마크 트웨인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스칼렛 요한슨은 <볼린가의 또다른 딸>과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빠르면 2008년에 선보일 예정이어서, 또 한번의 튜더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볼린가의 또다른 딸>은 앤 볼린의 언니이자 헨리 8세의 연인이었던 메리 볼린의 삶을 다룬 최초의 영화이며,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은 정부와 결혼하기 위해 국왕을 독살했던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여왕 메리의 격정적인 삶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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