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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속에 키워가는 '민주화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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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속에 키워가는 '민주화의 꿈'

석원정의 '우리 안의 아시아' <28> '8888항쟁' 참가자 네 명의 삶

1988년 3월부터 시작된 버마의 8888민중항쟁(1988년 8월 8일,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군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 당시 최소 200여 명이 사망했다.)은 들불처럼 버마 전역을 휩쓸었지만 무자비한 버마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8888민중항쟁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8888민중항쟁 이후 수많은 민주인사들 및 학생운동가들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조국을 떠났다. 더 많은 버마인들이 시위에 단순가담했다거나 항쟁을 측면에서 지원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역시 조국을 떠나야 했다.

이들은 버마의 국경지대에서 반독재투쟁을 계속하기도 하고, 더 멀리 해외에서 나름대로 군부독재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버마 군부독재에 맞섰던 이들 중 일부가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도 왔다. 한국에서 그들은 42만여 명의 이주노동자들 중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면서, 동시에 고국의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한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과거 해외로 망명했던 한국 민주화운동가들의 삶과도 어쩌면 닮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의 삶의 작은 조각을 살짝 들여다보자.
▲ 2007.8.8. 8888민중항쟁19주년 기자회견 ⓒ석원정

아버지의 뜻 이어받아 공무원 생활을 접다

46세의 W씨는 8888항쟁 당시 꽤 큰 지방도시 수도국의 엔지니어였다. 공무원이었음에도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고,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공무원의 시위 참여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8888항쟁이 실패한 후 전국적으로 검거바람이 불자 W씨는 직장을 포기하고 피신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기술자의 부족을 느낀 지방정부에서 어떤 문책도 없을 것이니 직장복귀하라는 공고를 냈고, 그제서야 W씨는 직장으로 돌아갔다.

W씨의 아버지는 이미 그 이전부터 반독재투쟁에 투신하였고, 정부의 검거를 피해 버마의 정글 속으로 피신해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 덕에 W씨의 누나와 W씨는 부모님이 정글에서 피신했을 때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던,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으려 했던 W씨는 다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결국 W씨는 공무원 생활을 접고, 버마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W씨는 한국에서 노동자로 지낸다.

독재 치하에서는 무역도 자유롭지 못 했다

51세의 Z씨는 사업가였다. 큰 무역업체를 운영하고 있던 그는, 태국과 싱가폴을 오가면서 사업에 열중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Z씨가 사업에 열중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Z씨의 부모는 반독재, 반군부활동가였는데 이를 감안하면 군사정부가 Z씨의 무역업을 곱게 봐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하여튼 정부는 여러 가지를 Z씨에게 요구했고, Z씨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군사정부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에게는 협박이 가해졌고, 사업체는 문을 닫을 지경이 됐다.

Z씨가 업무차 싱가폴에 머물고 있을 때, Z씨는 정부가 체포영장을 발부했음을 알게 되었다. 귀국을 포기하고 몇 개월 동안 태국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Z씨는 떠돌이 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한국의 생활이 그만저만하다는 얘기도 듣고 해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시위용품을 만들던 인쇄업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다

49세의 U씨는 작은 인쇄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인쇄업체를 운영하면서 U씨는 몰래몰래 유인물과 머리띠, 현수막 등을 만들어서 제공하였다.

그의 행적은 1988년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되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드디어는 버마정부가 U씨의 행적을 눈치챘고, U씨는 요주의대상이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U씨의 시위용품 제작은 중지되지 않았고, 그러자 버마정부는 비밀경찰을 보내 그가 외출한 사이 집과 사업장에 들이닥쳤다.

다행히 시위물품들을 잘 감추어놓아 물증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사업체 운영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평소 친분 있던 공무원으로부터 조만간 체포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U씨는 긴급히 국경을 넘었고, 태국에서 불안하고 무료한 생활을 보내다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재에 분노한 고교생, 국경으로 향하다

1988년때 T씨는 고등학생 1학년이었다. T씨가 재학중이던 학교는 8888항쟁의 시발점이 된 양곤 공과대학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자연히 대학생들의 시위와 정부의 군부독재의 탄압, 그럼에도 확산되어가는 항쟁의 불길들은 곧바로 T씨와 동료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T씨는 십여 명의 동료학생들과 총학생회(당시 버마에는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총학생회는 없었다고 한다)를 결성하고 홍보를 담당하였다.

군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양상도 격렬해지자 버마정부는 휴교령을 내렸고, T씨는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아예 학교에서 기거하면서 항쟁에 함께 하였다.

그해 7월경부터는 지역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지역 고교생 연합조직을 결성하였다.

항쟁실패 후, T씨는 30여명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집을 나와 경찰과 군인의 눈을 피해가면서 버마의 서쪽을 향했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외국으로 피신하던 많은 학생운동가들처럼 이들도 국경지대의 반독재투쟁조직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없이 의기 하나로 길을 떠났던 이들 어린 학생들은 곧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먼저 돈이 떨어졌다. 이들은 서로 상의하여 일부는 숨어있기로 하고 2명이 돌아와서 돈을 마련하여 돌아오기로 결정하였다.

T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T씨도 돈을 구하러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귀가하던 길에 공교롭게도 아는 아저씨를 만났고, 그로부터'너의 어머니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어딜 갔느냐, 빨리 집에 가보라'는 급보를 듣게 되었다.

놀란 T씨가 집에 도착해보니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출산하여 상태가 좀 좋지는 않았지만 위독한 상황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미 T씨의 행적이며 T씨가 집을 떠난 사실이 동네에 좍 퍼져 이를 아는 동네사람이 T씨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일단 친구편에 돈을 일부 보냈지만 T씨는 잠시 발이 묶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8888항쟁 주모자 및 가담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고 있었기에 집에 있는 것도 위험했다. T씨는 몇 달 동안 절에 가서 머리를 깎고 수행 겸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 했다. 결국 T씨도 '먼저 민주화가 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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