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에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들이 어떻게 변했을지 타구르(가명) 씨는 머릿속으로만 그릴 수 있을 뿐이다. 타구르 씨는 1998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일하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한 영국인 학자가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고 했던 방글라데시에서 타구르 씨와 가족들은 행복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29살의 나이에 부족한 가족들의 생계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몸을 실었다.
'운이 좋게도' 아직까지 단속과 추방의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았고, 또 9년 동안 큰 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던 덕에 '죽어라' 일만 해올 수 있었던 타구르 씨. 그는 이제 행복해질 준비가 되었을까?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이곳에서 벌고 있으니 그들은 이미 '코리언 드림'을 실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이들의 생각처럼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코리언 드림을 실현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행복지수 1위?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노동가능 인구의 5% 정도만이 고졸 이상의 과정을 이수한다는 방글라데시에서 타구르 씨는 전문대학까지 나와 전기공사 관련 회사에 다녔다. 우리나라 돈으로 10만 원도 채 안되는 돈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이었지만 타구르 씨는 20만 원 남짓한 임금을 받았다.
하지만 실업률이 40%에 달하는 방글라데시에서 식구들 중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타구르 씨 혼자였다. 따라서 가족 모두의 생계를 떠맡아야만 했으며 게다가 타구르 씨가 하고 있었던 일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해서 소득은 매달 일정하지 않았다.
"식구가 많았어요, 한국에 올 당시에는 엄마, 여동생 셋, 형, 형수, 그리고 조카 둘 이렇게 같이 살았어요, 여동생들은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고, 돈을 벌 수 있는 형제는 저랑 형 밖에 없었는데, 형은 몸이 안 좋아 일을 하기가 힘들었어요."
결국 타구르 씨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불법체류의 가능성이란 이유로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 노동자들의 입국을 잘 받아주지 않는 한국의 차별적인 정책 때문에 한국입국은 쉽지 않았다.
"한국 돈으로 900만 원 브로커에게 주고 왔어요. 지금은 1600만 원 정도 있어야 한국 올 수 있대요."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냐는 물음에 "여동생 시집 보내려고 모아뒀던 돈, 땅 담보 삼아서 빌린 돈, 주변 친척들에게서 빌린 돈, 다 모아서 만들었어요. 방글라데시에서 900만 원이라는 돈, 그냥 보통 사람들 8~9만 원 정도 월급 받으니까 평생을 모아도 만져볼 수 없는 돈이에요"라며 지난날을 곱씹으며 대답했다.
빚 갚는 데만 4년
그는 한 아동복 생산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2년 후 다른 직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의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한국으로 입국할 때 3개월짜리 단기비자를 받고 왔기 때문에 3개월이 지나서부터 그는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60만 원 받았을 때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집에 30만 원밖에 못 보냈어요. 근데 제가 보내주는 30만 원으로 식구들이 생활도 해야 하고 빚도 갚아야 하니까…빚 갚는데 오래 걸렸어요. 4년 넘게 걸렸어요."
빚을 갚고 나서는 돈이 모였냐는 물음에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남들이 볼 때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 한국 와서 돈 많이 벌어 자기 나라에서 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식구들도 먹고 살아야 하고, 여동생 셋 시집 보내고…4년 전에 엄마 간에 혹이 생겨서 수술 받을 때 모아둔 돈 300만 원 나갔어요."
방글라데시는 의료보험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못하다보니 병원비는 일반인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싸다.
"지금도 있어요"
"그리고 친척들, 이웃들 도와줬어요, 친척들이나 식구들이 아는 사람들 중에 못사는 사람들 집안에 큰 일 생겼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들이 엄마한테 이야기해요. 그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서 돈 잘 번다고 알고 있어요, 딸 시집 보내려고 해도 그 집안에 돈 버는 사람이 없어요, 누군가 죽었는데 돈 없어서 장례도 못 치르고 있대요, 나이 들어서 일 못하는데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면 안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런 일들이 한국에 오고 나서 꾸준히 있어왔냐는 물음에 그는 간결하게 "지금도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빌려주는 게 아니고 그냥 주는 거예요, 우리도 뻔히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다시 돈 돌려줄 수 없다는 거.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주는 거예요. 우리 엄마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나라 보통 사람들이 다 그래요."
실제로 한국에서 일하다가 고국으로 추방되어 돌아간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이나 다른 국가에서 다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가족과 친지 부양이라는 짐 때문에 대부분 돈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많은 노동자들은 송출회사에 갚아야할 빚과 가족 및 친지들의 생계 해결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한국에서 그는 행복했을까
그렇다면 타구르씨의 한국생활은 어떠했을까.
국적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9년 동안 타구르씨가 고스란히 받아내고 삭혀야 했던 차별과 멸시는 더 이상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그러한 차별과 멸시만큼 힘들었던 건 바로 생활고였다고 한다. 지금은 120만 원 월급 중 70만 원을 집에 보내주고 자신은 50만 원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60만 원씩 벌던 시절에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단 3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돈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빚을 빨리 갚아야 하니까, 하고 싶은 거 있어도 못해요, 제대로 옷을 사 입은 적도 없어요, 시장에서 옷 사입고 어제 입은 옷 빨아서 오늘 또 입고…. 비싸고 돈도 없으니까, 빵이랑 우유만 먹었던 때도 있었구요, 밖에서 사먹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어요, 기숙사 있었을 때는 좀 나았지만 기숙사 쫓겨난 이후에는 월세 때문에 30만 원도 못 부치는 달이 많았어요. 저만 그런 거 아니에요. 제 친구는 아파서 병원 갔는데 입원하라고 해서 그냥 병원에서 나와 버렸어요."
그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떨렸다. 한국에서 9년 동안 살면서 자기 나라에서는 구경도 못할 여러 가지 것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면서, 행여라도 방글라데시로 쫓겨 돌아가게 되면 그곳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 걱정된다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애초에 한국에 온 게 후회도 된다면서. 그의 목소리에 고단함이 묻어났다.
"외국인이 무슨 회식이야"…"우리는 1회용 물건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에 대한 몰개념이다.
타구르 씨의 임금이 100만 원이 채 안되던 시절,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의 임금은 200만 원이었다. 현재도 그의 임금은 같은 공장의 한국 사람들 임금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잔업이나 휴일 노동에 대한 수당이나 상여금 등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 8시 반부터 저녁 7시까지, 일 많으면 9시까지 계속 서서 일해요. 집에 가면 피곤해서 다른 일 못해요. 물론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기술 좋으니까 돈 더 받을 수 있어요. 근데 우리는 1회용 물건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오늘 일 일찍 끝내고 회식하러 가자'고 해서 우리도 작업복 벗고 샤워하고 회식 가려고 하니까 과장님이 '너희는 회식 없다, 외국인이 무슨 회식이야, 오지마' 그랬어요. 진짜 마음 아팠어요. 혼자 외국 와서 그런 차별을 견뎌내는 건 정말 힘들어요. 죽으라면 죽었지 이제 차별 대우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지 목소리가 커진다.
이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합법'적인 등록 이주노동자 역시도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 고용불안 등의 차별적인 노동조건은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노동 3권도 완전하게 거부당하고 있다. 핵심은 '체류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이주'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타구르 씨의 이야기처럼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사회적 비용으로만 사고하는 차별적인 시각을 고집하고 있으며 이주민의 정주화로 인한 교육, 의료 등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면서 내국인과 고용 경쟁 시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는 '인력'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주노동자의 노동은 이주노동자가 본국 노동자가 회피하는 열악한 업종에서 현저한 저임금으로 일하면서도 경기침체나 회사의 경영난 시에는 가장 먼저 해고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차별적인 인식의 전제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로서의 임금을 안정된 고용 조건 속에서 보장받을 수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8월부터 다시 시작되는 집중단속
<2005년 세계이주보고서>는 세계 인구 중에서 1억9000만 명이 이주민이며, 이것은 곧 세계인구의 35명 중 1명이 이주민임을 확인시켜준다.
바야흐로 세계는 '이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난 2월 여수에서 일어난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듯 한국 정부는 저열한 인권인식 수준이 빚어낸 반인권적인 이주노동자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법무부는 8월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 불법고용 처벌 및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관계기관 합동단속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법무부에서 한 달 전에 의정부랑 남양주에 있는 공장 사장한테 편지 보냈어요. 불법으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내보내라구요. 8월부터 다시 집중단속 한다고 해요. 제 친구는 이번 달 월급 받고 그만 둘 거래요. 몇 달 있다가 다시 일할 거래요. 성수동에 있는 저희 공장에는 아직 편지 안 왔는데…그래도 불안하죠."
"제 꿈이요?"
지금까지 얼마나 돈을 모았냐는 물음에 그는 400여만 원 정도 모았다고 대답했다. 매월 마지막 일요일마다 같은 나라 친구들과 장애인 시설에 봉사하러 간다는 그의 꿈은 방글라데시에서 조그만 공장을 하나 갖는 것이다.
"돈 있으면 조그만 신발 공장 하나 만들고 싶어요, 거기서 직원 몇 명 데리고 일하고 싶어요, 거기서 사장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일자리 만들어주고 싶어요,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 일 하고 싶어도 일자리 없어요, 나처럼 다른 나라로 일하러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가끔이지만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과 식사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떠드는 순간엔 타구르 씨 스스로도 자신이 이방인임을 잊어버리곤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곧 그들과 헤어져 혼자 지하철을 타거나 집으로 걸어갈 때면 출입국 사무소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잡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이 이주노동자 신분임을 자각하게 된다고 한다.
2004년 11월 경기도 부천에서 나이지리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단속반원이 쏜 '마취총'에 맞아 기절한 채 연행, 2006년 2월 터키 이주노동자 코스쿤 셀림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추락해 사망, 2006년 4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누르 푸아드 단속 피하려다 3층에서 떨어져 사망….
얼마나 많은 생명이 더 목숨을 잃어야 노예사냥과도 같은 이주노동자 강제단속이 중단될까. 이런 일들이 한국인에게 일어났다면 이 사회가 이렇게 조용했을까. 집중단속이 예고되어 있는 공포의 달 8월이 이주노동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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