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그것은 "빠빠밤 빰빠 빰빠바 ~♪♬"로 시작되는 유행가의 경이로운 감격과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강백호의 외마디 깨우침으로 기억된다. 그렇다. 난 농구장 아스팔트 위의 세련된 힙합 패션이 운동장의 뽀얀 먼지 사이로 공을 찾는 축구를 비로소 압도하기 시작했던 세대였다. 아직도 군대를 경험하면 누구나 '도로 축구세대'가 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농구의 설렘은 여전히 나를 감격게 한다.
화려한 기억의 꽃, 94년 월드컵 한국 대 스페인전
그런데 농구로 가꿔진 기억의 숲에서 가장 화려한 단 하나의 꽃을 꼽으려 하니 놀랍게도 농구가 아니었다. 농구에 대한 장황설로 시작해서 왜 갑자기 다른 얘기냐 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모든 스포츠를 통 털어 내게 가장 지배적 관전의 희열을 선사했던 게임은 아이러니하게도 축구 경기였다. 그렇다. 너무나 유명해 이제는 언급조차 식상해진 전설 같은 게임, 1994년 미국 월드컵 한국 대 스페인전이다.
한국 축구는 전통적으로 탈(脫)아시아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전까지 5차례의 월드컵에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1무 2패를 기록한 것을 포함해 월드컵에서 4무 10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전까지 한국은 아시아 예선에서 희열의 정점을 맞고 본선에선 '그럼 그렇지'를 연발하는 수준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렴풋이 1986년, 정확히 1990년 월드컵부터 기억이 나는데 대개의 경우 월드컵은 듣도 보도 못한 선수들이 펼치는 차원이 다른 기예(!)들에 침을 튀기는 것으로 시작해 한국 축구의 수준을 조롱하고 자학하는 것으로 끝났다.
1986년의 마라도나, 1990년의 스킬라치, 미첼, 리네커 등의 경기는 하나의 허벅지가 낯선 허벅지와 엮이며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각인시켰다. 그에 반해 한국 선수들의 손을 휘젓는 투혼과 투박한 태클은 그저 깊은 한숨을 만들며 우리의 한계를 자각하게 했다.
1994년 월드컵 역시 변함없었다. 브라질 아름다운 삼바 듀오 로마리오와 베베토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적 동선에서 예측 불가능한 생동적인 몸짓을 보여줬다. 클린스만, 바조 등도 만만치 않았다. 반면 한국 축구는 참극으로 일컬어지는 볼리비아전의 '뻥 축구'가 회자됐다. 얼마나 형편없었는가를 씹는 대세였지만 유일하게 단 한 선수(라기보다는 그 선수의 골)가 긍정적으로 언급되었다. 바로 그 유일한 예외는 서정원이었다.
스페인전에서 한국은 후반 40분이 되도록 0-2로 (일방적으로)지고 있다가 80분에 홍명보가 (그 때까지는 뒷걸음치는 소가 쥐 잡는 수준에서)스페인의 골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10분 후를 예고하는 디딤돌이었다. 후반 90분 서정원은 극적이라는 문자로는 당최 표현이 다 안 되는 그야말로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렸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유럽 축구에서 스페인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김호의 아이들, 한국 축구의 판도를 바꾸다
당시 우리의 수준이란 것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막 넘어가는 단계였다. 먹고 살만해졌다고 했지만 여전히 가진 자산은 정신력 깃든 몸뿐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정신분석 이론에서 인식의 세 차원으로 '상징계·상상계·현실계'라는 개념어를 사용했. 성인의 경우, 이 세 영역은 모두 함께 기능하여 인간의 의식 세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유아기 초기에는 전적으로 이미지의 차원인 상상계 속에서만 살아간다. 자크 라캉은 이를 '거울 단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인간은 이 단계를 거쳐 언어를 습득하고 상징계로 진입한다. 상징계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은 인간관계의 법칙에 복종하게 된다.)
우리에게 유럽은 광막한 대륙이었고, 남미는 미지의 세계 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온전하게 '타자'로 인식됐고 마주칠 때마다 그저 탄성을 읊조리는 상상계의 소박한 행복에 익숙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비로소 글로벌, WTO, 포메이션, 전술 따위의 상징적 체계의 구조들을 학습하며 필연적 실패를 체험하던 때였다.
상상계의 특징은 실재 자신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투영된 자신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를 통해 자신을 형성하며 결국 타자를 욕망하게 되는 결핍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상징계의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94년의 서정원, 1998년의 고종수, 이동국 등이 바로 그들이다. 상징계의 아이들, 아니 이들은 바로 '김호의 아이들(Kim Ho's Babes)'이다.
원래 '김호의 아이들(Kim Ho's Babes)'은 김호 감독이 수원 삼성에 재직하며 꾸준히 육성해온 젊은 선수들을 뜻하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었던 매튜 윌리암 버즈비경(1909∼1994)이 길러낸 '버즈비의 아이들(Busby Babes)'을 빗댄 표현이다.
김두현, 조재진, 신영록, 손대호, 조병국, 고창현, 김유진, 남궁웅, 손승준, 박주성, 정윤성, 조성환, 이강진, 권집, 이종민 등 현재 '김호의 아이들(Kim Ho's Babes)'은 거의 모든 연령대 대표팀의 주축이다.
기묘한 축구의 텍스트 속에서 빛나는 지도자
사실, 김호 감독이 직접 공을 차는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땅히 찾아지는 동영상도 없고, 간간히 특집 프로그램에서도 자료화면으로 흘러갈 뿐이다. 전설적인 선수라는 평이지만 내겐 별로 중요하진 않다. 그는 화려하기도 하지만 정말 존경할만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수원 삼성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8년간 그가 이뤄낸 성과는 성적 이상의 것이었다. '김호의 아이들(Kim Ho's Babes)'로 대변되는 그의 지도 철학은 장인의 존재 자체가 드문 우리 사회에서 한 분야의 대가가 어떠한 사회적 파급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분명히 한다.
2003년 11월 16일 '스승의 노래'로 마감됐던 고별전 이후 그의 행보는 협회의 권력에 굴종한 이들과는 또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는 이후 축구협회의 전횡과 무능에 맞서 싸우는 장외 투사가 됐다. 그리고 이 장외 투쟁은 김호 감독을 좀처럼 찾아보기 희귀한 정체성을 갖는 '멋쟁이'로 만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축구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며 사사건건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시·공간이다.
정몽준이라는 전근대적 '군주'와 군주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근대적 '조직',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꺼이 밤잠을 포기하며 유럽리그의 문자중계를 기다리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개인'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기묘한 텍스트가 바로 축구이다. 말하자면 축구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떠안게 된 양면(양적성장-질적빈곤)을 보여주는 훌륭한 표본이다.
어쩌면 김호 감독은 이 세 개의 꼭지점 모두와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고립되거나 배제되지 않은 채 평판을 잃지 않고 있는 유일한 스타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몸의 언어를 기다린다
얼마 전, 어느 술자리에서 통영에서 어린 선수들을 육성할 계획이라는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린 선수들에 대한 애정을 거침없는 열정의 언어로 쏟아내며 유소년 중심의 팀으로 프로에 도전하겠다는 그에게 정말 매혹됐었다.
프랑스 평론가 로제 카유아는 "문명인다운 태도를 일컬어 현실을 놀이로 여기는 것, 너그러운 태도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면서 인색함, 탐욕, 증오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던 바 있다. 그렇다면 김호는 진정 한국사회에서 희귀한 '놀이하는 인간'이다.
김호 감독이 대전시티즌을 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늙기란 힘든 사업'이라던 소설가 김훈의 읊조림이 빈말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영 행정엔 소질이 없다던 김호 감독이었다.
대전의 전력으로 볼 때, 한동안 그는 자신의 열정이 짙게 배어있는 아이들의 현란한 질주에 곤혹스러워 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 어떠한가, 몸이 나서는 자리에는 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 마련이다.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몸의 언어를 기다리며 나 역시 기꺼이 도로 축구세대가 되는 것을 두려워 않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