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진보논쟁'이 한창이다.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준비되는 길목에서 진보진영의 활동방향을 모색하는 논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고, 이 토론은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활동방향을 제시하는 토론이나 당위성을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현실에서의 실천과 구체적으로 매개되는 논의로 발전된다면, 더욱 풍부한 토론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시작되던 진보논쟁에 노무현 대통령이 끼어들면서 자칫 진보논쟁이 희화화될 위험이 생겨 버렸다.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정치권력이 불쑥 논쟁에 개입하고 나섰으니 차원을 달리하는 또 다른 논쟁이 불가피하게 되어, 결국 논쟁이 2원화되는 상황이 된 셈이다.
진보논쟁의 이면…"형식적 민주주의는 정말 완성되었나?"
필자처럼 현장에서 진보운동을 하는 활동가들로서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진보논쟁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흥미있게 그 추이를 지켜보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핀트가 어긋나는 듯한 그 느낌을 다소 거칠게라도 요약한다면, 대략 "진보타령 하기 전에 자유민주주의라도 제대로 지키라"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87년 6월항쟁 이후 대통령직선제가 회복되었고, 그 이후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그리고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나 형식적 민주주의, 이른바 좁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의 진보논쟁도 대략 그런 전제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도 과연 그런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으로 정리하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이 되지 않을까?
#1-1 "군사독재 시절의 집회금지가 자유민주주의?"
지난 2월11~14일 미국 워싱턴디씨에서 개최된 한미FTA 제7차 협상에 반대하기 위해 2월12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집회를 하고 광화문까지 평화행진을 하기 위해 집회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집회금지를 통고했다. 작년 11월 이후 계속 경찰의 집회금지 통고가 남발되어 왔기 때문에,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 이번에는 3보1배 행진을 하겠다고 신고했다. 혹시나 하였지만 역시나, 경찰은 집회금지를 통보했다. 집회주최 측인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평화집회의 상징인 3보1배 행진조차 금지시키는 것은 경찰파쇼적 작태라며 적극 항의하는 한편, 집회예정일인 2월12일에는 전투경찰의 철통같은 '원천봉쇄'를 뚫고,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직접 실현하는 투쟁에 나섰지만, 제도언론에서는 거의 '묵살보도'로 일관하였다.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아는 국민은 별로 많지 않다.
지난 시기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나 보던 집회의 원천봉쇄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도, 여전히 참여정부 하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나 '형식적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는 "완성"단계에 들어섰고 또 권위주의적 통치는 이제 종식되었다고 치부되고 있다.
즉 작년 11~12월 전국 각지에서 경찰이 "집회참석을 저지하기 위해 농민회 간부들을 전경버스나 사무실에 감금하고", 전투경찰이 "회사 정문에서 노조원들이 탄 버스를 에워싸서 억류하는"가 하면, "농민회 간부들을 미행·감시"하거나 "가족들을 찾아가 대회 참석을 막도록 협박"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경찰이 집회 당일 "농민회 회원들의 읍면 내에서의 이동 자체를 통제"하고, "당일 새벽부터 주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중심으로 전국 1252곳에 전·의경 383개 부대와 (전투)경찰관 1만3555명을 배치하여, 전국 11개 지역 83곳에서 집회참가를 위해 상경하려던 농민 2945명과 차량 261대를 차단"하기도 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원천봉쇄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은 "무법천지"가 21세기 참여정부에서 버젓이 재현되었다. 이런 게 과연 "완성 단계"의 자유민주주의란 말인가?
우리 헌법 제21조에는 "집회와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고, 헌법 제37조에는 "기본권을 법률로써 제한할 경우에도 지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기본권 관련 조항에 있어서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체계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자유롭고 평화적인 집회자유 보장은 "경찰이 마음에 들면 허락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지시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법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의 사안이 아니다. 경찰이 당연히 준수해야 할 헌법의 지상명령인데도 경찰당국이 위에 적시한 바와 같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집회시위 원천 봉쇄" 방침을 강행하고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와 헌법의 유린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또 작년 12월5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집회금지 통고를 철회할 것을 권고한 것에 대해 경찰청장이 내놓고 이를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3달째 똑같이 '집회 원천봉쇄'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옛말에 도둑이 들려면 개도 짖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이 딱 그런 꼴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중동 등 제도권 보수언론은 이 의제를 고의적으로 묵살하는 수준을 넘어, 도리어 정부와 경찰당국이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훼손시키는 방향으로 대처하도록 적극 선동하는 데까지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놀라운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고, 또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집회 원천봉쇄에 저항해서 민중들이 기본권을 직접 실현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고 있어도, 현장 상황에 너무나 둔감해진 탓인지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다. 이 땅의 그 수많은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모두 어디 가 있느냐? 그 수많은 헌법수호자들과 인권수호자들은 또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느라고 이런 헌법파괴와 인권유린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3월10일의 한미FTA 반대집회에서 무자비한 경찰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집회참가 시민들만이 아니라 취재중임이 분명히 식별되는 취재기자들까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폭행당한 기자들의 소속 언론사들은 모두 경찰폭력을 크게 다루었다. 기자들이 얻어맞는 우발적인 사건 덕분에 드디어 언론에서 경찰의 폭력진압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날은 경찰폭력 문제만이 아니라 경찰의 원천봉쇄 조치가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상황이었다. 제주도의 경우는 이날 오전 공항 탑승구를 1시간 이상 폐쇄하여 집회 참가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비행기를 탑승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강원도 화천에서는 시외버스를 타고 상경하던 농민회 간부들을 중간경유지에서 경찰들이 버스에 올라타서 강제로 연행하였고, 충북 괴산에서는 농민회 간부들의 상경을 막으려고 농민회 간부 집 앞을 경찰이 봉쇄하여 차량출입을 일체 금지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 전북, 전남 영광과 무안, 울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상경버스를 포위하여 상경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기습집회를 막는다는 구실로 광화문역, 경복궁역 등을 무정차 통과시키고, 독립문역에서는 아예 출입구를 봉쇄하는 무법천지를 연출했다. 가히 경찰파쇼 상황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던 원천봉쇄와 인권유린을 묵과하고서 어떻게 민주화된 세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1-2 "맞아 죽은 사람은 있는데 책임 지는 사람 없는 것도 민주주의?"
2005년11월15일 쌀개방을 반대하는 농민시위에 참석하였던 60대말의 농민과 40대의 농민이 집회장소에서 전투경찰에 맞아 죽는 참담한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경찰청장은 "집앞에서 쓰러져 죽었다"는 등으로 사인의 은폐조작을 시도하다가,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으로 확인되었고, 그 결과 경찰청장이 퇴진하고 대통령이 사과하면서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러고 난 뒤 7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살인진압 사례가 발생하였다. 작년 7월16일 포항건설노조원 고 하중근 조합원은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의해 머리에 부상을 입고는 뇌사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다가 8월1일 사망했다. 민간차원 진상조사단의 진상조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한 부검도 진행되었으나 경찰은 책임 회피로 일관했다. 결국 4개월이나 지난 11월28일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로 경찰의 살인폭력진압이 명백히 확인됐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보도문에 의하면 "하중근 조합원이 경찰의 집회, 시위 강제해산과정에서 사망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하였고, 또한 "포스코 본사 건물 점거를 이유로 포항건설노조에 대해 집회일괄 불허 및 금지 통보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시위자유의 본질을 침해"하였으며 위헌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의 과잉진압 부분에 대해 경찰 장비사용 문제에서 진압대원들이 방패를 수평으로 세워 가격하거나 공격용으로 사용한 사례나 소화기를 연막탄처럼 사용한 사례 등 경찰장비사용의 부당성을 인정하였으며 해산절차에서의 법절차 위반사실을 또한 인정했다.
시위진압과정에서 재작년에 2명의 농민이 사망한 후 연이어 작년에 또 노동자 1명이 사망하게 된 것을 보면, 이는 우연한 실수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현행 경찰의 시위진압방식에 살인폭력을 유발하는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 상황은 "집회장소에서 맞아 죽은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는 살인진압의 책임자인 경북경찰청장은 도리어 대구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또 위와 같이 살인진압 사례가 거듭 발생하고 있어도 재발방지책은 강구되지 않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못지 않은 '경찰파쇼' 상황이 아닌가?
정부 당국과 경찰이 스스로 살인폭력진압에 대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살인진압시스템을 혁파할 근본적 제도개선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제2, 제3의 하중근, 전용철과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
한편, 검찰과 법원의 태도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 최근 밝혀진 검찰의 자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포항건설노조 파업 당시 검찰이 건설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노동부의 실업급여 지급을 제지하는 등 과거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연상케 하는 공안 총지휘부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 검찰은 노조원들의 결집을 막기 위해 시위 중 사망한 건설노조원 고 하중근 조합원의 부검 장소를 포항에서 대구로 옮기는 '시신 이송' 계획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경향신문 2007.2.21.)
지난 시기 검찰이 사회적 갈등 사안에서 사실상 어느 한쪽 편 특히 사회적 강자의 편을 들면서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탄압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몇 년전 폭로된 조폐공사 파업유도공작에서 그 일단의 실상이 드러난 바 있는데, 이번에 이 보고서를 통해 한번 더 그 실상의 일단이 드러나게 된 셈이다. 검찰이 공정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한쪽 편에 서계 되는 군사독재 시절부터 고착화되어 온 이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사회정의를 현실에서 구현하기는 연목구어나 다름없다.
포항건설노조 사건과 관련하여 법원도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였다. 70명 구속영장 청구에 70명 전원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대략 5공 시절인 1986년 '건대 사건' 당시 800여 명에 달하는 무더기 구속영장 청구에 법원이 정찰제 방식으로 무더기 영장을 발부하였던 치욕스러운 기록을 재현한 것이다.
#1-3 "21세기 진보논쟁의 시대에도 레코드는 여전히 고장 나"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 버리겠다고 하였는데, 올해 1월18일 전교조 소속 교사 2분이 자택을 압수수색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강제연행되어 곧이어 구속되었다.
경찰 보안분실이 발표한 혐의내용의 핵심은 전교조 서울지부 전임 통일위원장과 전전임 통일위원장이었던 두 분의 교사가 전교조 서울지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선군정치 승리' 포스터를 게재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하였으며 이적표현물을 소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스터와 거의 같은 내용의 사진이 조선일보(Nkchosun.com)나 시사조선에 실려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찬양·고무로 문제 삼지 않는다.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에는 "선군시대 영웅대회"라는 제하에 총든 군인들의 모습이 실려 있는 아래에 "모두 다 선군시대를 빛내는 영웅이 되자!"라는 큼지막한 구호가 적혀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전교조서울지부 홈페이지의 포스터에는 위 조선일보 홈페이지의 사진과 거의 비슷한 이미지의 총든 군인들의 모습이 실려 있는 아래에 "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만세"라는 비슷한 형태의 큼지막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본다면, 이 두 종류의 포스터는 거의 같은 내용을 나타내는 포스터임이 쉽게 확인될 수 있다. 사실은 조선일보 외에도 동아일보나 통일부, 교육인적자원부 등의 홈페이지에도 비슷한 내용의 사진이나 포스터가 수록되어 있다. 누가 말했던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조선일보나 통일부 홈페이지에 싣는 것은 괜찮고, 전교조 홈페이지에 싣는 것은 찬양·고무로 처벌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중잣대의 적용이고, 구시대적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또 이분들이 현직교사로서 도주의 우려가 없고 또 이미 홈페이지를 통해 이른바 '증거'가 모두 확보되었으므로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으므로 구속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나, 또한 수사기관이 수사기관이 허위의 피의사실을 언론에 누설하여 마녀사냥식 여론공세를 퍼붓는다든지 또 불법적 도청이나 정보검색을 자행하였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는 등, 이런 종류의 사건에 으레 따라붙는 각종 구시대적 문제점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지난 70-80년대에 자주 듣던 곡조를 "이미 민주화가 충분히 진행되어", 이제는 "진보논쟁"에 열 올리는 시대인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들어야 되다니 지긋지긋하고 기가 막힐 지경이지만, 슬프게도 아직은 실제 상황이다.
어떻게 해서 '참여정부'에서 이런 블랙코메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 국정감사를 통해 확인된 바이지만, 전국에 보안수사대가 42개나 되고 밀실안가도 25개나 되며, 보안국 전체 인원이 2478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그 비밀의 일단이 있다. 그중에는 지난 5년간 이른바 '검거'실적이 전혀 없는 곳도 4개소에 이르고 있고, 2005년 1월부터 8월까지 전국의 경찰 보안수사대가 '검거'한 인원이 겨우 11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왜곡된 "사명감"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억지 사건을 만든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군사독재 시대 이래로 존재해 온 보안수사대 같은 기구를 그냥 두고서는 제2, 제3의 김 교사와 최 교사가 속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1 "약자에겐 추상 같고 강자에겐 관대한 것이 정의?"
희대의 권력형 사기극인 '론스타게이트'가 몸통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깃털 몇 개만 건드린 채 마무리되고 있다. 멀쩡한 외환은행을 부실은행으로 둔갑시켜 초국적 투기자본인 론스타에게 헐값에 팔아넘긴 사례 그 자체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제대로 계산한다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 전망치가 적정 기준인 8%를 훨씬 넘는 9.14%에 달하는 외환은행의 BIS 비율을 6.16%로 조작하는 등의 숫자왜곡으로 외환은행을 거의 반값 이하의 헐값인 1조3000억 원에 팔아치웠고, 그 결과 론스타는 국민은행에 그 지분을 매각할 경우 무려 4조1787억 원이나 차익을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 2006년도의 영업 결과 발생한 배당액 1조3000억 원까지 포함한다면, 론스타는 1조3000억을 투자하여 불과 3-4년만에 투자액의 4배가 넘는 무려 5조5000억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 이런 천문학적인 이득이 가능했던 것은 정상적인 투자소득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권력, 고위 경제관료와 초국적 투기자본, 그리고 국제적인 브로커 등이 짜고 벌인 범죄의 결과물임이 여러 조사결과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범죄상황은 확인되었지만, 그 사법처리는 도저히 불가사의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당시 론스타 측의 로비에 의해 외환은행의 편법(불법) 매각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와 김광림 당시 재경부 차관, 그리고 당시 김석동 국장으로부터 외환은행 매각관련 보고를 받았던 권오규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현 경제부총리), 또 론스타에 은행법 상의 예외승인 조항이 적용되도록 주도한 김석동 당시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현 재경부 제1차관), 또 론스타 측 법률자문을 맡았던 김앤장의 고문으로서 이 권력형 사기사건의 총체적 배후조종자로 꼽히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등에게 검찰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 대신에 검찰은 변양호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과 이강원 당시 외환은행장이 주범이라고 결론내렸다.
변 전 국장이 "단돈" 4000만 원 정도를 받고 외환은행 헐값매각을 주도했다는 식의 결론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사결론이다. 매각금액만도 1조3000여억 원에 달하고 재매각 차익이 5조5000억에 달하는 "큰 물건"을 헐값 매각하는데 그 대가로 4000만 원만 받았다는 결론 자체가 턱도 없이 어설프다. 검찰 수사가 이토록 시원찮은데, 그나마도 영장청구를 받은 법원이 검찰과 구속영장 청구-기각 신경전을 펼친 끝에 변 전 국장에게도 영장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고위경제관료들 중 검찰의 책임추궁 마지막 대상자마저 면책의 길목으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이러고도 '사회정의'를 입에 담을 수 있는가? 검찰이 소추권을 가진 유일한 수사책임기관으로서 그토록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노동자, 농민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그토록 "유능"하게 추상같은 채찍을 휘두르고 있으면서, 이러한 권력형 범죄나 국가적 범죄에 대해서는 이 정도 수준의 "능력"밖에 보여주지 못하느냐고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권력형 사기사건의 전형적 사건인 론스타게이트 관련 고위 경제관료들의 경우 그들이 론스타게이트 주역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서도,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도 역사와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 변 전 국장 외에 또 다른 실무책임자로 꼽히는 김석동 당시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은 금감위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가 이번에는 또다시 재경부 제1차관으로 영전했다. 그리고 또 다른 실세 배후로 꼽히는 권오규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부총리로 기용되었다.
도대체 이러고도 '민주정부'를 입에 올릴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론스타 매각은 엄청난 범죄로 밝혀졌지만, 죄를 지은 권력자 또는 고위 경제관료는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처벌받는 사람도 극히 일부분에 그치고 있다. 이른바 몸통은 모두 빠져 나가거나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는 결과로 끝나고 있다.
과연 영원히 그럴까? 그러나 틀림없이 차기정권 또는 차차기 정권에서 특검 수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벼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2-2 "재벌독재는 민주주의와 관계 없는 일인가?"
삼성 X파일을 특종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가 작년(2006) 11월에 선고된 2심판결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민주주의의 파탄을 예고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군사독재" 시대를 투쟁으로 끝장내고 나니, 이제 "재벌독재" 시대가 완성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보도된 바와 같이 삼성 X파일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처남이자 중앙일보 회장인 "홍석현과 (삼성그룹 부회장인) 이학수 사이에서 논의된 대통령 선거정국의 기류변화에 따른 여야 후보 진영에 대한 삼성측의 정치자금 지원문제와 정치인과 전현직 검찰 고위 관계자에 대한 이른바 추석 떡값 등의 지원문제로서, 이를 통하여 삼성그룹 측이 대통령 선거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과정에서 공권력 행사의 최일선에 있는 검찰조직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도모"(1심 판결문 내용)하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X파일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면, 당연히 그 녹음 테이프에 실린 내용대로 "이건희 일가가 자신들의 사적인 자본의 이익을 도모할 욕심에 돈으로 (대선 후보들에게 정치자금 명목으로 뇌물을 제공하고 또 검사들에게 추석 떡값 명목으로 뇌물을 제공하는 등의 방법으로 권력과 검찰을 좌지우지하려 공작하여) 국가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였는지(이상호 기자 1심 최후진술) 여부를 엄중히 조사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처벌하는 것은 물론 그 조사결과를 소상하게 주권자인 국민에게 공개하고, 향후 이런 국민주권 훼손 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는 데 모든 노력이 집중되는 것이 순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제의 본질인 "삼성재벌이 수백억 원대의 뇌물을 정치권과 검찰 등에 살포해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 한 모의"(이상호 기자의 상고이유서)의 진상은 수사되지 않고, 반면에 이 사실을 폭로한 이상호 기자는 기소되어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거나 또 전임 국정원장 등이 구속처벌 받는 것으로 종결되고 있다.
"재벌-권력-검찰-족벌언론" 간의 추악한 먹이사슬의 실체는 묻혀버리고, 그 대신 본질을 호도하는 수준의 조사와 처벌로만 그치고 있다. 특히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재벌총수 이건희 회장은 지난 몇 달간 미국에 피신하고 난 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귀국하여 여유있게 한국 제1위의 재벌총수로 군림하고 있다.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이러고도 정의와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는가?
X파일이 폭로되어 온국민이 충격에 빠졌을 때, 보수신여당과 보수구여당은 각각 특별법과 특검법 타령만 하면서 표면적으로만 서로 다투다가 결국 입법시간만 지체시킨 후, 일정시간이 지난 뒤에는 슬쩍 다른 이슈로 넘어가는 노회한 수법을 여지없이 구사하였고, 이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리고 '삼성 X파일게이트'의 또 다른 피의자 격인 검찰이 스스로의 내부범죄에 대한 수사주체가 된 것은, 필연적으로 수사 결과 처리시 진상을 은폐하게 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을 예비한 것이나 다름없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이러고도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삼성 X파일을 특종 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가 최근 수도권팀 의정부지국으로 좌천 발령되었다는 사실이다. 온 나라를 뒤흔드는 엄청난 특종을 한 기자를 포상하지는 못할지언정 좌천시키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언론의 자유를 스스로 목조르는 공영방송 MBC의 우매함이 너무나 통탄스럽다.
#3-1 "정부 비판하면 정부 광고 끊어지는 세상"
작년 11월경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국정홍보처를 거쳐 발주되던 정부광고가 갑자기 끊어졌다고 한다. 지난 몇 년간 빠짐없이 계속 주어지던 정부광고가 왜 중단되었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니 프레시안이 한미FTA의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도한 것을 비롯해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보도기조를 계속 유지한 것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서 그런 것 같다는 분석이었다.
유신독재시대인 1975년 초의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 생각이 번쩍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지만, 정부광고만 끊어졌을 뿐이고 그때와 같은 무차별적인 광고탄압은 아직 없다고 한다. "그나마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여정부 하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3-2 "FTA 비판하면 위해와 압력의 대상 된다?"
KBS스페셜에서 FTA의 문제점을 잘 알려준 역작을 거푸 방영하였다. 나프타를 겪은 멕시코 사례를 보도하면서 한국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의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던 KBS스페셜 프로그램인 "FTA 12년 멕시코의 명과 암"(6월4일 방영)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0월29일 미국의 공장식 축산의 실태와 그로 인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본격적으로 다룬 다큐멘타리 "얼굴없는 공포, 광우병 - 미 쇠고기 보고서"를 본 사람은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위험의 실태에 대해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을 제작한 이강택 PD가 두번째 프로그램을 방송한 지 2-3일만인 작년 11월초 갑자기 다른 파트로 전출되었다. 내막을 알아보니, 이 PD를 보호하기 위해 전출시킨 것이라는 "해설"이 유포되고 있었다. 도대체 "보호"라니, 누군가가 위해를 가하려 하고 있거나 또는 모종의 압력이 행사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양심에 입각해서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에 대한 비열한 보복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3-3 "참여정부에는 무슨 참여가 있는가?"
금년 초에는 더욱 기가 막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에 한미FTA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정부에서는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를 구성해 대국민홍보에 나서게 했다. 수십억 원의 혈세를 퍼부어서 FTA 찬성광고를 해대는 것을 보다 못한 농민들이 나락가마를 모아 TV광고비를 만들고, 이에 호응한 영화인들이 필름을 제공해 광고를 제작했는데, 이마저도 방송심의를 핑계로 광고를 못하게 했다. 경남 함안에서 농사 짓는 할머니께서 서울 간 자녀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 형식의 광고인 "고향에서 온 편지"의 대사는 지극히 간단하고 평범하다.
"우리같은 농민이 FTA가 뭔지 알겄나, 평생 농사 짓고 이제야 좀 살겠나 싶었더니 어찌된 일인고, 눈물이 다 나올라카네…. 미국쌀이 들어온다는데 어찌됐건 막아야 하지 않겄나…."
이 대사(멘트)에 대해, 방송광고 심의 결과는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 대사가 "소비자오인 표현(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소비자가 오인할 우려가 있는 표현 - 관련멘트 일체)"에 해당되고, 또 "국가기관에 의한 분쟁의 조정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한 일방적 주장이나 설명을 다루는 표현(관련멘트 일체)"이어서 멘트(대사)를 고쳐야 방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저 멘트가 "소비자오인 표현"이 될 수 있는지, 또 "국가기관에 의한 분쟁의 조정이 진행중인 사건에 대한 일방적 주장이나 설명"이 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더욱이 한미FTA를 찬성하고 홍보하는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와 정부 각 부처의 광고는 광고심의도 받지 않은 채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미FTA에 반대 또는 비판하는 이 정도 광고도 못하게 하는 것은 "참여"정부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지경이 아닌가? 이 정도 광고도 용납하지 못하는 주제에,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운운하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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