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학교를 다니는 딸아이가 왔다. 미국학교의 비교적 긴 여름방학동안 아빠와 지내기 위해서다. 인천공항 입국장 F게이트 앞에서 장시간 비행으로 파김치가 돼있을 아이를 떠올리며 안절부절, 서성거렸다. 비행기는 이미 1시간여가 지연이 돼있는 터였다. JFK에서 오는 아이나, 그걸 기다리는 나나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지루할까봐 가져간 프레드릭 포사이즈의 신간 '어벤저'는 정말 딱 두장을 봤을 뿐이다. 주변의 풍경이 도저히 책을 읽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 저 사람도 기러기인 모양이군. 저 두 남녀는 무슨 관계일까, 부녀라고 보기에는 남자가 좀 젊어 보이네?, 음 수상하군 수상해. 아무리 포사이즈가 긴장감이 철철 넘치는 얘기를 써대는 작가라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공항에 나온 사람들의 스토리를 상상하는 게 훨씬 더 흥미가 당겼다. 아마도 리처드 커티스가 <러브 액츄어리>를 만들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히드로 공항에 나와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싶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생생한 모습으로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잠자리형의 선글래스에 노란 야구모자를 쓴 모습이 영락없는 16살 망나니 십대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내 딸. 이제는 키가 175를 넘겨 안을 수도 없게 됐지만 그래도 내 살점을 떼어내 낳은 딸이다. 평소에 건방지고 까칠하기로 유명한 후배 중의 한명은 며칠 전, 당신은 자본주의적 좌파라며 코웃음을 친 적이 있다. 아마도 말이나 글과 실천이 다르다는 비판일 것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아이를 미국 학교에 보낸다는 것이다.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남들보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누리는 셈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미국에 보낸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잘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설마 그러겠는가. 다만, 갈등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 온 나 같이 변절한 386은, 내 아이만큼은 싸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신성적 50%를 반영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들의 틈에서 비껴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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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을 빠져나와 차를 타고 전용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아이의 질문이 쏟아진다. "아빠, <트랜스포머> 봤어? 미국에서 안봤냐고? 그거 한국이 먼저 개봉했잖아. <트랜스포머>, 재미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변신로봇 좋아한대? 거기 애들은 어릴 때부터 만화책으로 봐 온 얘기잖아. 아 그리고 말야. 아빠 그 영화 봤어? 폴틴 오 에잇. 존 쿠잭하고 사무엘 엘 잭슨 나오는 거." 아이가 영화제목을 얘기할 때 언제부턴가 귀를 바짝 세우게 됐다. 자칫 발음을 못알아듣기 때문이다. 폴틴 오 에잇. 1408... 아 <1408> 얘기하는 거군.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대화. "그 영화 한국에서 안했어." "어 그래. 근데 그거 재미없더라." "재미없기는…니 나이에 어울리는 영화가 아니어서 그래. 좀 있다가 판타스틱4나 보자." "헹, 그거 다운받아놨는데." "뭐시라? 미국 애들도 다운받고 그러니?" "아니. 미국 애들은 안하는데 미국에 있는 한국 애들이 다운받아서 돌려.크크크"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그놈의 불법다운로드는 국경을 뛰어넘는 문제가 돼버렸다. 아마도 미국에 있는 유학생들 상당수가 한국영화를 그렇게 '공유하는' 파일로 봤을 것이다. 그러니 부가판권시장이 커질 리가 없다.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방학동안만큼은 아이를 열심히 극장이나 DVD숍에 데려가는 것이다. 정말 누가 우리 애들 좀 말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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