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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지나도, 행복은 성적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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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지나도, 행복은 성적순인가요?"

['87-'07, 일상의 혁명③] 학력고사에서 논술까지

1987년 고등학교 2학년 민정이의 이야기

19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한반도를 뒤덮던 해, 고등학교 2학년인 민정이는 60명이 넘는 교실에서 선풍기 두 대의 바람에 의지하며 단발머리에 검정 실핀을 꽂은 채 '성문기본영어'와 '수학 정석의 기초'를 풀고 있었다. 남들은 이 정도 책은 1학년 때 끝내고 2학년 때는 '성문종합영어', '수학 정석의 실력'을 풀고 있는데, 영 마음이 불편하다.

'4당 5락'이라는 말이 칠판에 써 있었다. 학력고사 문제는 오로지 교과서 범위 안에서만 출제됐다. 과외는 금지됐고 재학생의 학원 수강도 허용되지 않았다. 사교육이라고는 고작 '한샘 국어 테이프'에서 들려나오는 '똥그라미~, 돼지꼬리~!'에 맞춰 문제집에 밑줄을 치는 훈련뿐. 민정이는 몇 차례에 걸친 모의고사 성적을 기초로 대학, 학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수험장에 지원자끼리 나란히 앉아 학력고사라는 '단칼 진검 승부'를 겨루었다.
▲ 1989년 개봉돼 화제가 됐던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프레시안

민정이가 대학생이 되었던 1989년 5월, '참교육'의 기치를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민정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에도 전교조를 지지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모든 남학생들의 로망 이미연 주연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개봉됐다. 1986년 1월 15일 새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어느 여중생의 유서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라는 유서의 내용이 귓가에 맴돈다.

민정이가 대학을 갓 졸업했던 1994년에는 서태지의 노래 <교실이데아>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기만 바라고만 있을까!" 강한 메탈 사운드에 절규하듯 토해내는 랩을 민정이도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게 됐다.

2007년, 고등학교 3학년 수연이의 이야기

2007년 6월, 허리까지 머리를 기른 고등학교 3학년 수연이는 35명 남짓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교실에 앉아 EBS 문제집을 풀고 있다. 에어컨 바람이 제법 차갑다.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 시험 범위는 교과서 반, 문제집 반이다. 작년에 새로 바뀐 보르네오 학생용 책상 위엔 교과서와 문제집이 층층이 쌓여 있다. 메가스터디, 완자, 디딤돌, 신사고…… 종류도 다양하다. 한 쪽에는 아침 지하철역에서 받아 챙긴 <메트로> 신문이 높여 있다. 신문에는 내신의 비중을 최대한 줄이려는 대학 측과 내신의 비중을 높이려는 교육부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기사가 1면에 실려 있다.

고등학교 3학년생 수연이는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 때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신등급제'라는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됐던 때이다. 중학교 때만하더라도 시험 때 당일치기밖에 하지 않았던 수연이는 이 제도가 낯설기만 했다. 90점이 넘어도 3등급이 나올 수도 있다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서인지 아이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노트를 빌려달라는 말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떤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의 노트를 훔쳐가는 일도 있더라는 흉흉한 소문도 들렸다. 시험 한번 망치면 대학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다녀왔다는 친구의 이야기도 들었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저주받은 89년생'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 2005년 5월 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 ⓒ프레시안

수연이가 2학년이 됐을 때 갑자기 전국이 논술 열풍으로 뒤끓었다. 각 대학의 입시에서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논술이라는 이야기가 신문 지상을 뒤덮었다. 선생님들도 수업시간마다 논술을 강조하며 지금부터라도 책읽기, 글쓰기 연습을 하라고 했다. 학교에서도 논술 보충 수업이 만들어졌고, 학원 광고에도 온통 논술 이야기뿐이었다. 이제라도 논술 공부를 해야 하나? 갑자기 어떻게 창의력, 논리력을 키우지? 엄마한테 졸라 논술 학원에 다녀야 하나? 수연이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교보문고 문제집 코너에 깔린 논술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수연이가 3학년이 되자마자 주요 상위권 대학은 수능의 반영 비율을 대폭 늘리겠다는 발표를 했다. 지난 해 여름방학부터 논술 학원을 다니던 수연이는 그저 허탈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한 달에 50만원 하는 싼 학원을 골라 주말마다 논술 첨삭 지도를 받았는데, 이제 그만 두고 수능에 올인해야 하나? 1, 2학년 때 내신 관리 제대로 못했는데 그럼 내신 부담은 줄어든 셈인가? 1학년 때부터 내신 1, 2등급을 도맡아 하던 정미는 내신 4등급까지 만점을 주겠다는 대학의 발표에, "이건 완전히 특목고 애들만 우대하는 거잖아!"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수연이는 '저주받은 89년생'이라는 표현을 불현듯 떠올린다.

2007년, 학부모 민정이의 이야기

민정이는 이제 30대 후반의 초등학교 학부모가 됐다. 대학 시절에 운동권에도 몸을 담았던 민정이는 아이를 마냥 사교육 시장에 내모는 것은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럼에도 학교가 끝난 아이를 차를 태워 학원 다섯 군데를 보낸다. 남편은 자꾸 아이를 내년에는 해외 어학연수를 보내자고 한다.

'간신히 비정규직 처지를 면한 우리 형편에 그게 과연 가당한 일일까? 하지만 올해 고3이 된 조카 수연이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역시 행복은 성적순인 걸까?

나와 조카 수연이의 고등학교 시절, 과연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 분명 학급당 학생수는 60여 명에서 30여 명으로 줄었고, 선풍기 두 대가 돌던 교실에 에어컨이 들어왔고, 두발도 어느 정도 자율화가 된 것 같은데 왜 지금 고등학생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까?
▲ 변하지 않은 건 서울대, 연대, 고대로 이어지는 대학서열화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프레시안

성문 영어, 정석 수학이 이름도 알 수 없는 문제집으로 바뀌고, 학력고사가 없어지고 수능이 생기고 논술이 생겼는데 어째 대학입시는 더 치열해진 걸까? 우리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 혹시 수능이나 논술 대신 TOEFL이나 SAT로 대학을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차라리 교과서와 문제집 몇 개만 가지고 학력고사를 보던 그 시절이 가난한 아이들에게나 부유한 아이들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었던 건 아닐까?

문제집도, 입시 제도도 바뀌었지만 어쩌면 변하지 않은 건 서울대, 연대, 고대로 이어지는 대학서열화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걸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는 등골 빠지는 사교육비 문제도, 허구한 날 문제집만 풀어대는 학교 교육도, 부의 대물림 수단이 되 버린 입시 문제도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이걸 바꿀 생각은 않고 내 아이 학원 보내서 대학 보내야겠다는 생각만 자꾸 드는 건 나 자신도 편협한 가족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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