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27살에 수염을 길게 기른 파키스탄인이었다. 내가 바바를 처음 본 때는 2001년이었는데 무슬림들 중에서도 유난히 이슬람교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무슬림들은 누구나 하루에 5번의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 중 최소한 두 번은 근로시간 중에 해야 한다. 요즘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이해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져서 고작 5-10분 정도 소요되는 기도시간을 용인해주기도 하지만 그 즈음에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도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런데 바바는 공장에 취업할 때부터 기도시간에 대해 양해를 얻고서 취업했다. 회사에서 기도시간을 줄 수 없다고 하면 취업하지 않았다. 술은 물론 담배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가끔 패스트푸드점에서 뭔가를 먹을 때가 있으면 바바는 오렌지 쥬스만을 먹었다. 돼지고기는 당연히 안 되고, 돼지고기 튀긴 기름에 튀긴 다른 음식들은 부정 타서 안 되고, 그러니 먹을 거라곤 오렌지 주스밖에 없었다. 거기에 유달리 파키스탄 전통옷과 모자를 즐겨 입고 쓰고 다녔는데, 전통옷 차림을 한 바바는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9.11테러의 배후로 미국이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을 연상시켰다. 어쩌면 전통 옷차림과 수염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돈독한 신앙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갖게 된 편견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다른 파키스탄인보다도 유독 오사마 빈 라덴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바바가 우리 단체를 자주 들락거리던 그 즈음에는 미등록노동자가 78.9%나 되고 유일한 외국인력 도입제도인 산업기술연수제는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인권단체, 학계의 집중적인 폐지요구에 직면하고 있을 때였다. 자연히 인권단체들과 이주노동자들은 자주 집회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 단체에는 파키스탄인과 중동지역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찾아오던 터라 파키스탄인, 이란인 등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곤 했었다. 바바도 자주 집회에 참석했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집회를 할 때면 수도권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을 감안하여 대개 오후 3시를 시작 시각으로 잡는다. 오후 3시에 집회가 슬슬 시작되면 집회분위기가 고조되는 때는 4시가 넘어선다. 그런데 바바는 분위기가 막 고조되어가는 4시 30분 정도만 되면 항상 집회를 빠져나갔다. 이유는 '기도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가야겠다'고 말하는 바바가 나는 무척 놀라웠다. 기도시간이니 집회를 빠진다는 것이, 더구나 그 집회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권익향상을 위한 집회인데 그 이유로 빠진다는 것이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바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집회장소 근처의 어디 조용한 곳에서 잠시 기도 드리고 오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지만, 얼굴과 손을 씻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서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마음으로야 솔직히 붙들고 싶었지만 그의 신앙을 말릴 수 없으니 '조심해 가라'고 보내주었다. 그 다음부터도 바바는 항상 기도시간이니 가겠다면서 집회 중간에 빠져나갔고, 나는 말릴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무슬림들에게 물어보면 바바와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집회를 마치고 빨리 집에 가서 씻고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바는 집회에 참석하기 싫어서 그런 건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서 참석 안 하면 그만인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면서 바바의 사생활에 대해서 듣기도 했는데, 바바는 한국에서 5년간 있으면서 한번도 아가씨와 데이트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미등록노동자라고는 하지만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사랑도 잘만 하던데, 바바는 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물이나 성품이나 특별히 빠지는 면이 없어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였기 때문에 의외였다. 어쩌다 팔팔한 젊은이가 그렇게 되었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바바는 정색을 하면서 아가씨를 만나서 놀고 하는 것은 무슬림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그래 가지고 결혼할 아가씨는 어떻게 만날 것이냐'고 또 물었더니 부모님이 소개해주실 것이고, 자신은 부모님이 소개해주는 아가씨와 결혼할 것이라고, 무슬림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아마 한국인 중에 바바 같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면 나는 그 신앙심에 질려 상종조차 하려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타국의 젊은이가 보여주는 그 흔치 않은 굳은 신앙심은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그런 신앙심이 소비와 향락생활에 빠져들기 쉬운 한국에서 생활을 잘 지켜가면서 건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겠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국에 취업한 이주노동자들의 본국은 특정종교 국가인 경우가 많다. 일상생활에 종교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을 정도인 국가에서 온 이들은 힘든 한국생활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서로 힘을 모으기도 한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돈을 갹출해 방을 얻고 그 방을 기도방으로 설정해 매주 금요일이면 기도방에서 기도도 하고 회합도 한다. 전통적인 불교국가인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돈을 갹출해 자신들의 부처님을 모셔놓고 예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본국에서 온 스님이 계신 절을 찾아가 종교생활을 한다. 가톨릭을 포함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한국에 널려 있는 게 교회이고 성당이니 자신들이 가고 싶은 기관을 찾아갈 수 있지만 자주 찾는 교회나 성당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서울의 경우 혜화동성당에는 필리핀인들이, 강변역 근처의 교회에는 이란인들이, 왕십리의 교회에는 몽골인들이 많이 가는 식이다. 또 교회나 성당은 특정국가 출신 성직자를 초빙해 외국어로 예배나 미사를 보거나 혹은 그 나라 국민을 불러서 교회의 일을 보게 한다든지, 상담소 비슷한 일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종교기관을 자주 찾아오게 한다.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또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대상이 이주노동자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일상생활에서 종교가 중요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때로는 그 버팀목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장벽을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조차 포기하게 하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고선 이를 이주노동자에게 오히려 뒤집어씌우는 사업주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는 무슬림이다. 무슬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스리랑카 여성이나 임금을 체불하고서 딱 잡아떼는 사업주에게 '알라신은 아신다'며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포기하던 한 이란인의 모습에서 종교의 양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그 두 가지 모습, 어느 쪽이든 한국생활의 애환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어느 쪽이든 어떠랴! 싶은 것이 옆에서 지켜보는 이의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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