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열린우리당 탈당을 공식 선언 한 뒤 한 재선 의원은 "요 며칠 인생 공부,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16명 의원들의 탈당선언이 당초보다 앞당겨 나오기까지 중도신당 김한길 대표를 중심에 두고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우여곡절을 토로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 의원이 아니어도 최근 대통합을 주장하는 의원들 사이에선 김 대표에 대한 '억하심정'이 적지 않게 표출됐다. 김 대표가 추진한 민주당과의 소통합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의원들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소통합에 대한 비판의 표적이 박상천 민주당 대표에서 김한길 중도신당 대표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세 정씨가 당했다"?
소통합 타결을 전후해 열린우리당에선 "세 정(鄭) 씨가 김한길 대표에게 당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소통합 타결 직전까지 김 대표와 긴밀한 물밑 접촉을 벌여 온 정세균 의장, 정동영 전 의장, 정대철 상임고문을 지칭한 말이다.
김 대표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감정이 격앙된 경위는 이렇다. 소통합 타결 직전이던 지난 주말 께 세 사람을 비롯한 우리당의 일부 전략통 의원들이 김 대표를 잇달아 접촉해 제3지대 통합 계획을 설명하고 소통합을 그만둬 줄 것을 요청, 김 대표도 이에 대한 수용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김 대표는 결국 다음날 박상천 대표와 소통합을 타결해버렸다. 우리당 쪽에선 김 대표가 박 대표와의 협상 과정에서 특정인사 배제론과 지도체제 문제에서 일정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우리당 쪽과 나눈 이야기를 압박카드로 사용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중도신당이 제3지대 신당론에 가세할 경우 박 대표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압박이었던 모양이다.
김 대표는 특히 소통합을 만류하는 정동영 전 의장에게는 그렇게 할 경우 일부 의원들이 민주당으로 합류하게 돼 중도신당의 교섭단체 지위가 와해될 수 있으니 정동영계 의원 3∼4명을 추가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일종의 '의원 꿔주기'는 성사되지 않았으나 정 전 의장 측은 상당한 배신감을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2월 김 대표가 1차 탈당그룹을 이끌고 나올 때만 해도 인적 구성이나 노선에서 정 전 의장과 가까워 유대관계가 남다를 것으로 예상됐으나, 시간이 갈수록 김한길 대표의 독자성이 짙어지던 터에 이번 일을 계기로 김 대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세 정 씨는 반격했다. 민주당과 중도신당이 통합을 선언한 5일 오전 나온 정동영, 김근태, 문희상 등 전직 의장단 명의의 성명이 그것. "소통합은 총선용"이라고 맹공한 이 성명은 정대철 고문이 물밑에서 발표를 조율했으며 정세균 의장과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원들은 특히 정동영 전 의장이 고심 끝에 성명에 동참한 점을 대통합론의 대세가 확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14일 이후로 미뤄뒀던 탈당 움직임은 이때부터 가팔라졌다. 하루속히 대통합파 제세력이 우리당을 탈출해 대통합의 물꼬를 트고 소통합 움직임을 주저앉혀야 한다는 데 이심전심이었다. 정세균 지도부도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해 '돌격대' 격인 16명의 탈당으로 이어졌다.
중도신당 측은 이같은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결국 열린우리당을 등지고 민주당과 통합을 선언한 김한길 대표에 대한 배신감이 지리멸렬하던 대통합론자들을 결속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노선갈등 주목
대통합-소통합론 간의 격화된 공방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이런 내막은 매우 유의 깊게 살펴볼 대목이다. 단지 정치적 통합의 절차와 방법론의 이견에 국한되지 않고 노선 대립으로 격화될 조짐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열린우리당에선 민주당과 중도신당이 결합해 탄생할 중도통합민주당을 상대로 노선 시비를 거는 일이 눈에 띄게 부쩍 늘었다. 최재성 대변인은 "중도개혁노선에만 동의하는 사람으로 향후 통합을 해나가겠다는 것은 대통합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최 대변인의 발언은 지병문 의원이 '한나라당 2중대'라고 직격해 논란이 됐던 민주당 박상천 대표를 겨냥한 것이지만 중도신당 역시 열린우리당보다 우경화된 노선을 스스로 확인했다.
8일 중도신당 강봉균 의원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단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그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과 당 내 개혁 지상주의자들"을 탓했고, "실용주의적 중도세력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도통합민주당의 향후 정책 기조와 관련해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당 일각에선 이를 1970년대 후반 제1야당 신민당을 이끌던 이철승 씨의 '중도통합론'의 부활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 씨는 당시 유신 독재에 대항하는 선명야당의 기조를 버리고 협력과 견제의 관계로 선회하자는 주장을 폈다. 사실상 유신 독재에 대한 협력을 중도로 포장한 이 노선은 즉각 '낮엔 야당, 밤엔 여당'이라는 사쿠라 논쟁에 휘말려 비난을 받았다.
손학규 잡고 당권 잡고?
이같은 정황을 근거로 중도통합민주당의 소통합론과 중도 노선이 취할 대선 방정식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박상천 대표가 거듭 손 전 지사를 향해 러브콜을 보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손 전 지사가 표방하는 '중도노선'이 이들의 갈 길과 표면적으로는 일치하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김한길 대표 역시 최근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포함해 정치권 밖의 훌륭한 분들을 모셔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탈당 직후 김 대표가 범여권 일각에서 고개를 든 손학규 영입론과 관련해 "대적하는 정치세력의 후보로 거론되는 분을 모셔와 대표주자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모순"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김 대표가 8일 "9월22일 추석연휴 이전에 오픈프라이머리를 완료하고 중도개혁세력의 대표주자를 선정하겠다"며 "통합민주당 출범과 동시에 경선규칙을 마련하고 대선 예비주자들과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밝힌 대목도 다분히 손 전 지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읽혔다.
물론 손 전 지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대통합론자들이 추진하는 판이 마땅치 않을 경우 이들과 손을 잡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경우 김 대표나 박 대표는 범여권 후보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를 보유함으로써 '대선후보 없는 불임정당'이라는 눈총을 극복하고 범여권 오픈프라이머리 등 대선판의 주도권을 행사해 나갈 수 있다.
오픈 프라이머리가 불발에 그친다 해도 후보단일화 과정을 통해 손학규 전 지사를 범여권 대선후보로 만들어낸다면 킹 메이커가 된 김 대표와 박 대표는 자연스럽게 당권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여기에 범여권의 세력 통합까지 성사되면 금상첨화다. 당권은 곧 내년 총선의 공천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통합민주당으로선 최상의 시나리오이겠지만 현실화될지는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범여권의 유력 인사들과 다수 세력이 김한길-박상천 시나리오에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최대의 걸림돌이다.
나름대로 지략에 능한 김한길 대표와 박상천 대표는 이름값 대로 이것마저도 돌파해 낼 수 있을까? 갖은 비난 속에서도 이철승 씨의 중도통합론은 78년 10대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총 득표에서 야당이 여당을 누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30년 전과 지금은 정치상황이 다를 뿐더러 실체가 불분명한 중도 노선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경고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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