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 신문화의 요람지**
우리나라 신교육 도입의 상징적 기념물이라 할 수 있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은 정동제일교회 남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1984년 3월 학교가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하면서 동문회관 등으로 사용하던 교사 대부분은 현재 배재주상복합빌딩 신축공사로 헐려 없어지고, 그 앞 운동장터 배재공원에는 러시아대사관과 IMF 사태로 유명해진 미국계 투자회사 JP 모건 체이스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사진 43> 배재공원
배재학당은 미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8월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걸음마를 뗀 신식 사립학교였다. 아펜젤러는 이듬해 6월 8일 정식으로 학교를 개설하여 6명의 학생으로 첫 학기를 시작하였다. 고종은 1887년 2월 이 신식 교육기관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을 내려주면서 관심을 표시하였다. 이후 배재학당에는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나 전신국 교환수로 취직하려는 목적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1886년 11월 현재 재적학생수가 32명에 이를 정도로 학생수가 늘어나자, 아펜젤러는 1887년 초 새 교사의 신축에 들어가 9월 준공식을 거행하고, 11월 1일 입주를 하였다. 새 교사는 지상 1층, 반지하 1층의 구조를 가진 아담한 르네상스식 벽돌교사였다.
<사진 44> 배재학당 벽돌교사 신축공사
1층에는 강당(예배당)·도서실·학당장실과 4개의 교실이 들어섰고, 반지하는 고학생들이 학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산업부에 배정하여 학생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워주는 자조(自助) 훈련과 실업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그 자리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르네상스식 건축물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다. 1932년 9월 희년기념 대강당 신축공사가 시작되면서 헐려 버린 때문이다.
배재학당은 교사 신축과 더불어 교사진용도 대폭 보강하여, 1888년 올링거(F. Ohlinger) 목사와 존스(G.H. Jones, 趙元時) 목사가 합류하고, 1889년에는 한학자 최병헌이 한문 선생으로 부임하였다. 남관(南館) 자리에 40명 가량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100평 규모의 한옥 기숙사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처럼 학당이 근대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자, 아펜젤러는 마태복음 20장 27~28절을 한역한 ‘欲爲大者 當爲人役’(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을 학당훈으로 삼아 근대 시민을 양성하는 교양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교과과정도 예비과정부 2학기와 교양과정부 3학년으로 정비하여, 영어·한문·언문을 기본 교과목으로 하고, 과정과 학년에 따라 수학·과학·역사·음악·미술·의학 등을 가르쳤다.
<사진 45> 정동 배재학당의 거의 유일한 흔적
그런데 이 시기에 배재학당을 다닌 학생들 가운데 양반층 자제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양반층 자제들이 배재학당을 찾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와 과거제가 폐지되면서부터였다. 새로운 관료임용제도의 실시와 신식 학제의 도입으로 신교육에 대한 수요가 양반층 자제들에게까지 넓게 확산된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1895년 2월 조선정부와 배재학당 사이에, 정부에서 보내는 200명 한도의 학생에 대해 영어·역사·지리·정치경제·수학·과학 등을 가르치되 그 학자금은 물론 교사 월급의 일부까지 국고에서 보조한다는 위탁교육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배재학당의 등록 학생수는 이전의 배가 넘는 169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배재학당의 학제는 학년별이 아닌 학과별 학제를 채택하여 영문·국한문·신학과의 3개 학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부위탁생들은 대부분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생단체라 할 수 있는 협성회(協成會)가 조직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협성회는 서재필의 지도 아래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 학생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기관지 『협성회회보』를 발행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회원은 찬성원(준회원)까지 합쳐 1898년 2월 현재 약 300명에 달했는데, 양홍묵·노병선·이승만·주시경·민찬호·신흥우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안창호도 찬성원으로 여기를 거쳐 갔다.
<사진 46> 협성회 학생운동의 주역 이승만
협성회의 토론회는 이후 독립협회의 토론회로 확산되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여론을 조성하고 민중을 계몽하면서 이승만·안창호같은 개화 개혁운동의 소장 지도력들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정치개혁운동을 본격화하는 과정에 그 일선 행동대로 활약하면서 청년학생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갔다. 우리나라 근대 학생운동 제1세대의 산실이었다고나 할까.
***독립신문사 터- 신아빌딩 앞?**
지금은 헐려 없어졌지만 배재학당 대강당 건물 앞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독립신문사 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곳은 독립신문사 사옥터가 아니고, 한때 『독립신문』을 인쇄하였다고 하는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rilingual Press)가 있었던 자리이다. 신문사 편집국과 인쇄소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착오로 보인다.
<사진 47> 헐리기 이전의 배재학당 대강당
삼문출판사는 1888년 배재학당 르네상스식 벽돌교사 지하 산업부실에 설치된 인쇄소였다. 학당 내에 인쇄소를 설치하는 작업은 상하이 중국감리교활판소에서 문서선교 사업에 종사하다 1888년 1월 배재학당 교사로 부임한 올링거 선교사의 책임하에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중국 상하이에서 서구식 인쇄기와 주조기를 구입하고 각종 연활자를 구비한 다음, 그해 말 인쇄소의 문을 열었다. ‘삼문출판사’라는 공식명칭은 한글·영문·한문 세 종류의 인쇄를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문출판사는 1889년 아펜젤러가 지은 『성교촬요(聖敎撮要)』를 출판한 것을 비롯하여, 1892년 1월부터 The Korean Repository를 발행하고, 1897년 2월부터는 『죠션그리스도인회보』를 발간하는 등 신문·잡지·단행본에 걸친 북감리회 선교부 문서선교활동의 센터가 되었다. 출판사의 식자·인쇄·제본 등의 작업은 거의 전적으로 배재학당 근로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인쇄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1892년 말경 벽돌교사 옆편에 별도의 인쇄소 건물을 신축하고, 예전 자리에는 제본소를 두었다. 1893년 9월부터는 헐버트(H.B. Hulbert) 선교사가 재차 내한하여 출판사의 운영 책임을 맡았다. 이후 삼문출판사는 1900년 5월 배재학당 산업부에서 독립하여 감리교인쇄소로 이름을 바꾼다.
<사진 48> 독립신문 창간호
한편 삼문출판사가 한때 독립신문을 인쇄하였다는 데 대해서는 서로 엇갈린 주장들이 있다. 신용하 교수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 당시부터 독자적인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었다는 입장인 데 반해, 이광린 교수는 창간 당시의 여건상 처음 얼마간은 배재학당내 삼문출판사에서 인쇄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춘병 목사는 북감리회 선교부에서 미국 본부로 보낸 연례보고서에, 삼문출판사가 1898년 5월에 독립신문사와 ‘2년간의 인쇄계약’을 맺었다는 보고가 있는 것을 근거로, 1898년 5월 11일 서재필이 윤치호에게 신문사를 인계하고 물러난 이후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삼문출판사에서 독립신문을 인쇄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직 뭐라 단정지을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보다 확실한 관련 자료들이 찾아질 때까지 미결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사진 49> 독립신문의 창간을 통해 근대언론사의 새 장을 연 송재 서재필
그렇다면 독립신문사 사옥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최근 오인환 교수가 추적한 바에 따르면, 정동제일교회 동쪽 신아빌딩 앞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된다. 오 교수가 그 근거로 들고 있는 자료는,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있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1959년 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에서 발행하는 『회보』(Transaction, Vol. 35)에 기고한 “A History of Chong Dong Area and the American Embassy Residence Compound”라는 글이다. 이 글 21쪽에서 헨더슨은 “(한말 미국공사관) 정문 저 건너편 쪽, (1959년) 현재의 법원 정문 바로 옆에서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고 쓰고 있다.
<사진 50> 독립신문사 사옥터로 추정되는 신아빌딩 자리
이를 바탕으로 오 교수는 옛 대법원 정문 서편, 지금의 신아빌딩 바른쪽 앞을 과거 독립신문사 사옥이 있었던 장소로 추정하였다. 앞으로 더 보완적인 조사가 있어야 하겠지만,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어쨋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으로, 한국 근대 언론사는 물론 지성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독립신문사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얄팍함에 저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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