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손탁호텔 터에서 남동쪽으로 난 이화여고 교정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본관 건물 옆으로 1986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세운 ‘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라는 기념비가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학교 이화학당이 처음 문을 연 자리이다.
<사진 29> 이화학당 100주년기념비
지금의 이화여고·외고 교정은 과거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언덕 능선 동·서편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만, 처음의 교사는 언덕 남동편, 도성 안쪽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동문 안쪽의 심손기념관과 그 맞은편 프라이 홀이 있었던 주차장 자리는 1910년대에 새로 매입한 땅들이니까,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는 본관 일대야말로 이화학당의 발상지인 셈이다.
이화학당은 모자가 함께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여 더 유명한 미북감리회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대부인이 1886년 5월 31일 한 명의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여성교육을 기피하던 당시의 사회통념으로 인해 적지않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이화학당은 1886년 11월 교실과 숙소 등을 갖춘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 교사를 마련하고, 1887년 2월 무렵 고종으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으면서 착실히 그 발판을 다져 나갔다.
<사진 30> 설립당시의 이화학당
그리하여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으로 늘었고, 교과목도 영어 외에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다. 그 뒤 학생수가 늘어남에 따라 1897년 한옥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2층 벽돌로 된 서구식 건물(Main Hall)을 짓기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을 보았다. 메인 홀은 교실․기숙사․식당․목욕탕에 전기시설까지 갖춘 당시로서는 최신식 건물이었는데, 6.25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 31> 1900년 완공된 이화학당 메인홀
교과목으로는 국어·한문·영어·성경·수학·역사·지리·과학 등을 가르쳤는데, 1904년에 4년제 중등과를 설치하여 1908년 제1회 졸업생을 냈고, 같은 해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910년 4월에는 4년 과정의 대학과를 신설함으로써 초등·중등·고등 교육을 모두 실시하여, 1914년 한국 최초의 국내 여자대학 졸업생으로 김앨리스·신마실라·이화숙 등 3명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그 해 이화유치원을 설립하고, 1915년 유치원사범과를 신설하였으며, 1917년에는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한편 1918년에는 고등과와 보통과를 이화학당에서 분리하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독립시켰다. 대학과와 예과 또한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35년 보육학교와 함께 신촌에 새로 마련한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립된 학제를 가지고 운영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은 1928년 정식으로 폐기되기에 이른다.
<사진 32> 1920년대 이화학당 캠퍼스 <1. 프라이홀 2. 심프슨홀 3. 음악관 4. 메인홀 5. 후퍼기념유치원> / 이화여대
1920년대 이화학당 캠퍼스 약도를 보면, 지금의 동문안 주차장 자리에 1923년 완공된 프라이 홀이, 그 맞은편에 1915년에 지어진 심손기념관이, 길 건너 예원중학교 입구에는 음악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에는 메인 홀이 관록을 자랑하며 서 있었고, 그 아래쪽 길가 테니스장 자리에는 1921년에 지어진 후퍼기념유치원(Ralph Edgar Hooper Memorial Kindergarten Building)이 있었다. 그리고 언덕 너머 도성밖 유관순기념관 자리에는 서대문정거장이 있었다.
***‘유관순 신화’와 역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비 아래쪽 쉼터에는, 3.1운동 당시 메인홀 기숙사에 기거하던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이 팻말과 함께 남아있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3.1운동의 상징으로, 이화여고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물이다.
<사진 33> 유관순이 빨래하던 우물
유관순은 1916년 4월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면서 이화학당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고등과에 입학한 이듬 해인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시위와 3월 5일 남대문 학생 연합시위에 참여한 다음, 고향인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지령리)로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이 일로 유관순은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을 거쳐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부르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1920년 10월 12일 열 아홉 살의 꽃다운 삶을 마감하였다. 이화여고에서는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유관순기념관을 세우고, 기념관 2층에 열사의 호적․재판기록․수형기록표․명예졸업장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34> 이화 교정의 유관순기념관
그런데 유관순은 정작 3.1운동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름 없이 민족의 제단에 몸 바친 수많은 꽃다운 넋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일제에 의해 토막 살해당했다는 등의 ‘유관순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아마 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와 역사를 변별할 필요를 느낀다. 역사상의 유관순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3.1운동의 상징이 될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거기에 굳이 신화적 요소들을 채색 가미한 것일까? 혹시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말 친일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박인덕은 당시 이화학당의 교사로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함께 어린 나이의 유관순에게 애국애족의 신앙을 불어넣어 준 인물로 손꼽힌다. 그러고 보니 유관순이 한 여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함께 옥중투쟁을 벌이는 기념영화의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도 같다.
<사진 35> 유관순 수형기록표
해방후 유관순 기념영화가 나왔을 때 조병옥이 그것을 보고 노발대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의 지도자는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그 선봉이었다. 그런데 기념영화에서는 유관순의 설득으로 그 모든 거사가 이루어진 것처럼 그려놓았으니, 조병옥이 화를 낼만도 했을 것이다.
<사진 36> 천안 지령리의 유관순생가 / 류관순기념사업회
위인만들기의 덫이라고 할까... 위인으로 받들어지는 인물들 뒤에는 언제나 그 디딤돌이 되어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회사의 광고 카피처럼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하는 것일까?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과 함께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면서도, 천하의 간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원균의 서글픈 운명이 비단 그만의 억울한 사연은 아닐 것이다. 조연에게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박수를 보내는 위인만들기야말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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