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때를 대략 88서울올림픽 직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사회적 집단으로서 우리 사회에 존재를 드러낸 때를 1994년 산재피해 미등록노동자들의 경실련 강당 농성으로부터 잡으니 한국의 이주노동자운동은 15년도 채 되지 않았다.
서구와 같은 오랜 노동유입국과 비교해보면 아주 짧은 기간인데, 역동적인 한국이어서 그런지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래도 생길 일은 대개 다 생겨 왔다고 생각된다. 그 생겨난 일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이주노동자들의 자발적 저항의 움직임이다. 이런 저항들은 주로 임금체불이나 산재 등 노동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을 때 일어난다.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텐데, '외국인근로자 첫 집단파업'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사회를 잠시 시끄럽게 했던 한 사건이 있었다.
경기도 포천 소재 A가구 파업-2002년 1월 21일부터 24일까지 이주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무려 9개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100여 명이 참가한 파업으로서 이주노동자의 한국 유입 역사상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그 파업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였다. 첫 번째 파업 역시 같은 사람들이 감행한 파업이었는데, 파업시간이 하루뿐이었고 금방 타결이 되어 한국사회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두 번째 파업은 우연히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와 연결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파업도 첫 번째보다는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파업의 원인은 첫 번째, 두 번째 다 임금체불이었다.
당시 다국적으로 구성된 이 회사의 노동자들은 평소에도 자국민 중 한국어 잘 하는 사람을 한 사람 뽑아서 일종의 조장의 역할을 맡겼고, 이들을 통해 사업주는 작업지시를 내리고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렴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막상 파업에 들어가자, 두 번째라고는 하지만 경험도 없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고 서로간의 의사소통도 조장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이들이 우연히 아주 짧고 효과적인 구호를 외쳤는데, 단 두 마디뿐인 그 한국어 구호는 한국인들의 감각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이주노동자이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돈 줘!"
그리고 2007년.
상담을 하다보니 여기저기 회사들에서 노사분규가 은근히 발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노사분규라 함은 한국인들의 노사분규와 같은 조직적 반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정반대의 모습, 즉 사업주들의 부당한 인권침해에 이주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노사분규의 시작이야 사업주들이 노동법을 위반한 인권침해이지만 그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이 비록 강도나 지속성이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단결해서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국적을 뛰어넘어 한국인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서로 단결하고 있었다.
어느 사업장에서 1시간 동안 파업이 있었다. 그 회사에는 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몽골에서 온 여성들이 12명 있었는데, 회사에서 회사의 사정으로 휴업하게 된 날짜의 임금을 공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회사 사정으로 휴업하게 될 경우 70% 이상의 임금을 지급해야 함을 알고 있던 이들은 부당하다고 여겼고, 회사에 임금을 요구하기로 서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1시간 동안 일손을 놓았는데, 마침내 회사에서는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고, 그리고 일을 시작했다.
그 파업에 참여하였던 몽골여성 중 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 몽골여성은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 통역이 없으면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정도였고 다른 여성들도 한국어를 거의 못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서로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었을까? 내 의문에 몽골여성은 깔깔 웃더니 그대로 재현했는데, 그게 아주 걸작이었다.
이들 여성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월급명세서에 기재된 공제금액을 가리키며, "돈 줘? 일 해! 돈 안 줘? 일 안해!" 라고 했다고. 그리고 다른 여성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함으로써 동의의 뜻을 나타냈단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구호는 역시 '돈 줘!'였다.
그런가하면, 많은 논란과 비판 끝에 2007년 폐지된 산업기술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몽골인 더기 씨는 이미 여러 차례 파업을 감행한 경험이 있다. 더기와 4명의 몽골인들은 인천 남동공단에 있던 B회사에서 2005년부터 일했었는데 이 회사는 임금을 제때 주는 적이 없었다. 항상 2-3개월씩 미루었고, 견디다 못한 이들이 몇 번 항의하고 따지고 하면 일부를 지급하곤 했다. 또는 이들이 몽골출신 산업기술연수생의 사후관리를 맡은 회사에 달려가 호소하고 사업장을 바꿔달라고 요구하면 그제서야 또 일부를 지급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세 명의 몽골인은 그 회사를 떠나고 더기 씨와 또 한 사람, 이렇게 두 명만 남게 되었다. 세 명이 사업장을 떠났는데도 상습적인 임금체불과 지급지연은 계속 되풀이되었고, 그러자 이들의 항의방식은 점점 거칠어졌고 그것은 파업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2005년 12월, 2006년 3월과 5월, 2007년 3월- 이렇게 여러 차례 파업했지만 이들은 2007년 3월에야 2007년 1월치 임금을 받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다.
이 외에도 몇몇의 회사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파업하는 경우가 있었다. 먼 남의 나라에까지 돈 벌러 온 사람들이 '굳이' 노사분규의 한쪽 당사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는가.
또한 이들의 행동을 '파업' 혹은 '노사분규'라고 표현하고,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혹자들은 그 결과와 파장을 염려하는 것 등은 우리 사회의 시각일 뿐이다. 단지 그들은 월급을 주지 않으니, 차별적으로 대우하니 일손을 놓은 것뿐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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