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의 탈노(脫盧) 승부수는 성공할까.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 극단적 대립각을 긋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양대 주주가 다시 손을 맞잡았다. 지난해 12월28일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통합신당 추진과 관련한 합의문을 발표한 지 4개월여 만이다.
지난 2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두 사람의 관계는 '질서 있는 통합신당 추진' 주장(김근태)과 '당 해체 결의' 주장(정동영)으로 어긋나는 듯싶기도 했으나, 결국 정 전 의장이 김한길 의원이 이끈 탈당파 대오에 합류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지금까지 한 배를 타고 왔다.
두 사람의 행보는 아직까지도 '전략적 공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대선주자로서 운신의 폭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노 대통령과의 결별수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5월 말'을 빅뱅의 시기로 예견했다. 최근 벌어진 청와대와의 갈등 양상대로라면 그 이후까지 당에 더 남아 있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필사적인 명분쌓기
두 사람을 노 대통령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한 건 사실 정운찬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이었다. 정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은 범여권 세력이 외부 인사를 지렛대 삼아 자연스레 제3지대로 옮아가는 과정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참신함'으로 '노무현 색깔'을 세탁하고자 했던 당초의 계획이 망가졌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 대통령과 두 전직 의장 사이에 형성된 갈등 국면은 완충지대가 사라진 데에 따른 필연적 수순이었다. 이들은 외부 유력주자의 붕괴에 따른 범여권의 '심리적 공황'을 '내부 주자론'으로 돌려 출구를 찾았다. 그들 스스로 제3지대 통합신당의 '깃발'이 될 수 있다면 위기는 곧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순발력은 정동영 전 의장 쪽이 빨랐다. 노 대통령과의 '4.27 회동' 사실과 그 내용이 9일 뒤에 공개되면서 청와대와 범여권의 대립전선은 '노무현 대 정동영'의 구도로 압축됐다. 청와대는 정 전 의장 측의 '언론 플레이'를 의심했으나 정 전 의장 측은 "우리 쪽에선 어제 기자들이 당 쪽이 아닌 소스를 근거로 회동 사실을 물어와 답을 한 것일 뿐"이라고 펄쩍 뛰었다.
그러자 김근태 전 의장이 지난 3월 10일 가진 청와대 회동도 뒤늦게 공개됐다. 김 전 의장 측에 따르면 당시 회동은 김 전 의장의 요청으로 이뤄졌으며 한미 FTA와 범여권 통합을 주제로 노 대통령과 팽팽한 견해 차이를 확인한 자리였다고 한다.
회동 사실이 공개된 과정이야 어쨌건 두 사람에겐 노 대통령과 만나 '이견의 확인'이라는 절차를 거친 일이 알려진 것 자체가 중요하다. 왜 '노무현 구상'으로는 안 되는지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탈당'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들은 사실상 '탈당'으로 가고 있음에도 "당적이 중요한 게 아니다"(정 전 의장 측)거나 "우리 스스로 결별을 선언할 이유가 없다"(김 전 의장 측)고 에둘렀다. 노 대통령과 친노계에 '우리당 사수파'라는 딱지를 붙여야만 자신들의 '열린우리당 이탈'이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과 친노계가 7일 "질서있는 통합 추진"을 적극 설파한 것 역시 이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적어도 열린우리당의 공중분해를 의미하는 5월 말 '빅뱅'이 현실화되기까지 정, 김 전 의장과 청와대와 친노계의 대립은 우리당의 몰락과 분열에 대한 책임론을 중심으로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마지막 공조의 승패는?
정, 김 전 의장의 실질적인 고민은 '5월 빅뱅' 뒤의 상황이다.
첫째는 세 부족이다. 지난해 12월 말 두 사람이 통합신당 추진과 관련한 합의문을 발표하며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그어나갈 때만 해도 줄잡아 100여 명의 의원들이 양대 계파로 분류될 정도로 두 사람의 당내 지분은 막강했다.
하지만 현재 친(親)정동영 성향의 의원들은 정청래, 채수찬 등 지역구 의원 9~10명 선으로 위축됐다. 박명광, 박영선, 김현미 의원 등 10여 명은 비례대표다. 친(親)김근태 성향의 의원들 수도 엇비슷하다. 우원식, 이인영 의원 등 지역구 의원 10여 명과 유승희, 홍미영 의원 등 비례대표가 5~6명이다.
게다가 정세균 의장은 이날 비례대표 의원들의 탈당 시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단속했다. 비례대표들이 의원 직을 유지한 채 당적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출당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 경우 우리당의 양대 주주가 공언한 '빅뱅'이 20여 명의 탈당에 그쳐 찻잔 속의 태풍이 될 수도 있다.
둘째는 우리당을 박차고 나온 뒤의 거취가 매우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정 전 의장 측은 탈당 뒤의 행보와 관련해 "천천히 두고 보자"고만 말했다. 친정동영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강래, 전병헌 의원 등이 '김한길 신당'에 결합하지 않은 점에 미루어 정 전 의장의 탈당 시 독자적인 그룹으로 합류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근태 전 의장이 구상하는 개혁블록 구성 움직임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천정배 의원이 이끄는 민생정치모임과는 지속적인 물밑교감을 가져가고 있으나, 미래구상 등 시민운동 진영은 당장 이들과 결합해 직접 세력화하는 문제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셋째는 통합신당 추진기구 및 대선후보 연석회의의 성사 전망이 현재로선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세력과 세력을 결합시키는 통합신당 추진 논의는 지역기반을 가진 민주당을 중심으로 형성돼가고 있다. 열린우리당 재선그룹과 민주당 의원들이 '제3지대 통합신당'에 속도내기를 시작했고 '김한길 신당'도 다시금 민주당과의 통합협상에 나설 방침임을 밝혔다.
대선후보 연석회의에 대해서도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과 천정배 의원 외에 다른 대선주자들은 시큰둥하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나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물론이고 친노계 대선주자인 한명숙, 김혁규 의원 등이 당장 여기에 결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넷째는 '탈노'가 목적인 정, 김 전 의장의 전략적 공조 관계가 탈당 시점부터는 사실상 마감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노 대통령과 맞서 각기 개별적으로 지난한 후속 싸움을 벌여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깊어가는 고민
이같은 중장기적 전망이 아니더라도 두 전직 의장의 행보는 그리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선 이번 갈등을 기폭제로 범여권의 친노와 비노가 갈라서는 대선 다자구도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다자구도는 결국 범여권의 당면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단일한 반한나라당 전선의 수립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고, 그 책임론을 둘러싸고 친노계와 두 전직 의장 계열 간에 치열한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당장은 노 대통령의 무자비한 공세에 당내 중립적 성향의 의원들까지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지난해 5.31 지방선거 이후 두 사람이 불가피하게 맺어 온 '탈노 전략적 공조'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이어질 수 있을지 불투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정, 김 두 전직 열린우리당 의장의 고민은 계속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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