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과 DJ 사이에 대선전략과 정당구도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워낙 큰 게 일차적인 이유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사수와 영남권 세력화의 의지가 강한 반면 DJ는 서부벨트 복원과 중도 통합을 통해 양당구도가 안착돼야 한다고 본다. '원칙론'과 '현실론'으로 표현되는 두 사람의 정치노선을 결합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지지율이 고작 1~3% 대인 범여권 주자들에게는 노 대통령과 DJ의 영향력에 개의치 않을 만한 독자적인 기반도 없다. 현재로선 거의 모든 대선주자들이 두 사람 사이에서 부단히 눈치를 보거나 어느 한쪽에 얹혀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경과에 비추어 볼 때 노 대통령과 DJ가 대선후보를 보는 시각도 매우 다르다.
청와대가 2일 공개한 대선후보 '네거티브 리스트'는 대단히 공격적인 노 대통령의 정치 개입을 실감케 한다. 이에 따르면 친노계로 분류되는 주자들을 제외하곤 하나 같이 '죄목'을 부여받아 손학규, 정동영, 김근태, 천정배 등이 죄다 'X'다. 향후에도 이런 방식으로 노 대통령은 최종적인 '노무현의 카드'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관측이 대체적이다.
DJ는 시간을 두고 기다릴 것으로 보인다. 초장부터 특정 후보를 낙점하는 듯한 과잉행동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DJ-손학규 교감설'에 동교동계가 펄쩍 뛴 것은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햇볕정책과 통합노선을 기본으로 하되 당내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곧 DJ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상인적인 현실감각'을 강조하는 DJ도 동교동계의 물밑 움직임을 통해 후보군을 저울질 할 가능성은 있다.
노무현의 힘
대선주자들의 입장에선 노 대통령의 화살을 피해 DJ의 품에 안착하는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야 할 판이다. '5월 빅뱅'이 공식화된 이상 대선주자들은 좋건 싫건 스타트라인에 섰다. 열린우리당을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 첫 번째 관문은 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다.
일찌감치 탈당한 천정배 의원은 '대결'을 선택했다. 한미 FTA 이슈로 노 대통령과 전선을 그어놓았다.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전 의장은 아직 불확실해 보인다. 탈당을 시사했지만 '탈당하겠다'고 못을 박지는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데다 당 의장을 번갈아 맡은 이들은 열린우리당 탈당에 대한 부담감이 누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들은 적어도 통합신당에 대한 다수의 동의와 대선후보 연석회의라도 성사시켜 탈당의 명분을 만들려고 안간힘이다. 이런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이들은 다시 망설일 수도 있다.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 진영이 공히 걱정하는 게 또 있다. 노 대통령과의 대결을 선택했을 경우 과연 그 화살을 감당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미 FTA 협상 타결 이후 상승세를 탄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현재 30%대. 그러나 상당기간 상승국면이 지속돼 50%에 육박할지도 모른다는 게 양측의 공통된 관측이다. 부동산 값의 안정세, 한반도 정세의 안정세 등이 모두 노 대통령에게 유리한 환경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와 '경제'라는 대선 이슈를 블랙홀처럼 청와대가 집어삼킬 수도 있다.
대선주자로서 주도권 행사도 못해보고 임기 말 지지율이 50%가 되는 권력자의 화살을 맞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정 전 의장이 "노 대통령이 비판했던 고건, 정운찬 씨가 모두 대권 꿈을 접었다"며 "어느 시점에선 나한테도 할 것"이라고 한 발언은 괜한 말이 아니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의 '주저앉히는 힘'을 대선주자들이 어떻게 피해갈 것인지가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DJ의 힘
'노무현의 화살'을 피한 뒤엔 'DJ 적자 경쟁'이 남아 있다. 'DJ 눈치보기'는 김홍업 씨의 4.25 재보선 출마 및 당선과 관련해 대선주자들이 일제히 "통합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호응한 대목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마저 지난 5일 호남을 방문해 김 전 대통령과 햇볕정책을 극찬하며 김홍업 씨의 출마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한 것도 DJ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례다. 당초 정 전 총장 진영에선 김 씨에 대한 비판 발언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않은 셈이다.
비호남 출신 대선후보들의 DJ 구애는 눈물겹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광주에서 햇볕정책 계승 의지를 강조하며 호남의 전략적 선택을 호소한 것은 이를 위한 포석이다. 김근태 전 의장도 지난 18일 광주를 방문해 "김근태가 살아 있는 호남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라며 "작년 가을 북핵위기 때 정치권 밖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다면 정치권에는 김근태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이 노무현 정부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부족'을 비판하며 DJ의 평양 방문을 주장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해찬 전 총리, 김혁규 의원 등 친노계를 중심으로 방북이 잦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가 고스란히 노 대통령과 친노계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경계이자 DJ의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친노계로 분류되는 한명숙 전 총리 역시 노 대통령의 지지설을 부정하며 "비전과 정책을 가진 대선후보로 홀로 서서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지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어야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 전 총리의 말대로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노 대통령과 DJ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일차적 관건은 비전과 정책을 가진 대선후보로 홀로 설 수 있느냐다. 지지율을 최소 5%, 여건이 허락하면 10%까지는 올려놔야 운신의 폭이 생기지 않겠냐는 게 각 캠프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현재 얻고 있는 30% 대의 지지도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70% 가까이는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대부분을 나눠 갖고 있다. 다시 얘기하자면,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지금과 같은 도토리 키재기 식 지지율을 넘어설 수 있는 여지는 노 대통령의 영향권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범여권의 그 누구도 현재로선 '민망한 지지율'을 타개할만한 묘책을 못 찾고 있는 셈이다. 자칫하면 노 대통령과 DJ가 주도하는 범여권의 대선구도가 선거일까지 계속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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