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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풍 개화물결 넘실대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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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구풍 개화물결 넘실대던 거리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간②

***옛 러시아공사관-'아관파천'의 현장**

강북삼성병원 앞 예전 서대문(돈의문) 자리에서 경향신문사 방향으로 접어들면 과거 선남선녀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았던 정동길이 나온다.

100여년전 정동은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을 비롯한 외교공관들이 터를 잡고,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의 선교기지 또한 입주하면서 서구풍의 개화물결이 넘실대는 거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해서는 새로운 정치 1번지로 급부상하기도 했는데, 그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 바로 1896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아관파천은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내각에 포위된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하여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사건을 말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을 겪으며 고종은 자신도 민비처럼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밤마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는데, 사전에 발각됨으로써('춘생문사건') '미관파천' 시도는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을미의병이 일어나 궁궐을 지키던 친위대 병력 대부분이 의병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춘천․원주 지방으로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경복궁에 대한 수비가 느슨해지자, 고종은 그 틈을 타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태자와 함께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감추고 경복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신무문(神武門) 앞에 대기중이던 러시아 병사 5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하였다.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뒤 고종은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내각 대신들에 대한 포살령(捕殺令)을 내리고, 새 정부를 발족시켰다. 일종의 친위 쿠테타였다고나 할까. 이후 고종은 1987년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이어하기까지 1년여 동안 러시아공사관을 무대로 삼아 국정을 처리하였다.

<사진 11> 러시아공사관의 고종

아관파천의 역사현장이었던 아관(俄館: 러시아사공사관)은 경향신문사에서 정동길을 따라 200m쯤 들어가다 예원학교 앞에서 다시 북쪽으로 200m쯤 꺾어져 올라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언덕 위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우아한 벽돌조 건물로,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를 맡아 1890년(고종27) 준공했다고 한다. 지금은 6.25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고 탑만 외로이 남아있지만, 아관파천 당시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웅장한 규모에 반원아치 창들과 박공모양 페디먼트 장식들이 어울어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진 12/ 13> 러시아공사관의 옛 자태와 지금

러시아공사관은 8.15 해방 당시에도 소련총영사관으로 그대로 사용되다 남북이 분단되고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폐쇄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건물 또한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한동안 사람들의 이목에서 멀어져 있던 옛 러시아공사관은 1990년 한국 정부와 소련(지금의 러시아)이 국교를 재개하면서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외교 관례대로라면 이 곳을 대사관 부지로 다시 반환해야 할텐데, 애당초 러시아가 공사관 부지를 취득하게 된 경위와 내역이 불확실했을 뿐만 아니라, 담을 맞대고 미국대사관저가 자리잡고 있어 복잡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사진 14> 배재 옛 교정에 들어선 러시아대사관

결국 이 문제는 정부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배재고등학교의 부지 일부를 내놓음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개운치만은 않은 뒷맛을 남겼다. 현재 탑 부분만 남은 옛 러시아공사관은 1973년의 복원공사, 1981년의 주변 조경과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원학교 교정의 미 북장로회 선교본부**

정동공원으로 꾸며진 옛 러시아공사관 앞마당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내려오다 보면, 미국 북장로회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 元杜尤)의 사택이 있었던 예원학교의 아담한 교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원학교 일대는 1885년 4월 언더우드가 이 곳에 처음 정착한 것을 계기로, 미 북장로회의 선교본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사진 15> 예원학교 일대

언더우드학당 교사 기포드(D.L. Gifford)가 그린 이 일대 약도에 따르면, 언더우드 사택 내부의 교회를 중심으로 그 동편에 여학교가 있었고, 북쪽으로 제중원 의사 헤론(J.W. Heron)과 빈튼(C.C. Vinton)의 집이, 서쪽으로 언더우드학당(예수교학당) 제2대 학당장 마펫(S.A. Moffett)의 집이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더우드의 집 남쪽, 길 건너편으로 지금의 이화여고 심손기념관 자리에 언더우드학당이, 그 서편에 학당 교사 기포드의 집이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 16> 정동 북장로회 선교기지 약도

이렇게 미 북장로회 선교본부는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 사이에 남북으로, 선교사들의 사택과 교회, 남학교와 여학교를 아우르며 자리하고 있었다. 이때 그 중심은 물론 언더우드의 집이었다. 언더우드의 사택은 미국공사관 공의(公醫) 자격으로 그보다 6개월 먼저 와 있던 알렌(H.N. Allen)이 주선하여 마련해 준 집이었다. 본래 강 모라는 정승이 살았던 집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정동 13번지 예원학교 교정 서편을 아우르는 넓은 저택이었다.

당시 언더우드 사택 안에는 사랑채와 안채, 그 사이에 一자 모양의 건물 해서 모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 대지가 ㄴ자 모양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위치한 一자 형 건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로 출범한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의 첫 예배당이었다.

당초 알렌을 비롯한 서양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만 전념한다는 조건부로 입국이 허용되었다. 미 북장로회의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 역시 입국할 때의 공식 직함은 '제중원 교사'였다. 그런데 1886년 5월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었다. 천주교 측에서 이 조약 제9관 2항의 '교회'(敎誨)라는 대목을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까지 묵인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여 종현(鐘峴: 지금의 서울 명동)에 대성당을 지을 대지를 사들이면서 공개적으로 선교활동을 밀어붙인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언더우드를 비롯한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 방침에도 불구하고 반(半)공개적으로 선교활동에 들어갔는데, 정동장로교회의 설립 또한 그러한 배경 위에서 이루어졌다.

<사진 17> 러시아공사관 주변 북장로회 선교기지

정동장로교회는 1887년 9월 27일(화요일) 14명의 한국인 세례교인이 언더우드 사택에 모여 두 사람의 장로를 선출하고 당회를 조직한 데 이어, 10월 2일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서상륜을 비롯한 의주상인들의 전도를 통해 이미 평안도 의주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松川]에 자생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언더우드는 그들에게 은밀히 세례를 주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의 첫 선교사역을 시작하였고, 그들로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장로교회를 출범시켰다. 교회를 창설할 때 참석한 14명의 세례교인 가운데 13명이 의주상인들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정동장로교회의 창설은 언더우드의 내한에 앞서 서상륜 등이 미리 뿌려놓은 씨앗의 결실이었던 셈이다.

언더우드 사택의 건물 한 채를 빌어 근근히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정동장로교회는, 1894년 신분제 폐지를 비롯한 일련의 근대적 제도개혁이 단행되면서 조선정부의 정책이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음에 따라, 1895년 겨울 경희궁 건너편 지금의 피어선빌딩 인근에 별도의 새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10년 5월 신문로1가 43번지, 지금의 장소에 새로 지은 '벽돌예배당'으로 이전하였다. 그에 따라 교회의 이름 또한 '정동교회'에서 '서대문교회' 또는 '새문안교회'로 바뀌어 불리다가 결국 새문안교회로 정착되었다.

***정신여고의 요람 정동여학교**

예원학교 교정 서편이 미 북장로회의 선교본부 역할을 하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택이자 오늘날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 자리로서 한국 장로교회의 발상지였다면, 그 동편은 오늘날 정신여고의 요람지에 해당하는 여성 신교육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기포드의 약도를 보면 예배당 동편으로 담장을 맞대고 여학교가 그려져 있는데, 1887년 6월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개설한 첫 여학교로 정동여학교(貞信女高의 전신)가 시작된 바로 그 장소이다.

<사진 18> 정신여고의 요람 예원학교 교정 동편

제중원 여의사 애니 엘러스(A.J. Ellers)가 여자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시작한 정동여학교는, 오누이 관계에 있던 길 맞은편의 언더우드학당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고아원학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0년 도티(S.A. Doty)가 제3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점차 제대로 된 학교의 틀을 갖춰 나갔다. 도티는 1895년 10월 지금의 종로5가 연못골(蓮池洞)로 교사를 이전한 데 이어, 1903년 여자중학교로 학교의 체제를 개편하였다. 학교 이름도 연동여학교, 연동여자중학교로 바뀌었다가, 1909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 인가를 받으면서 현재의 정신여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사진 18-2> 정동여학교 초대교장 엘러스와 학생들 / 정신여고

이후 정신여학교는 김필례 김함라 김마리아 유각경(유길준의 조카딸) 등 여성지도자들을 배출하며 북감리회 계통의 이화학당과 더불어 기독교 여성운동은 물론 한국 근대 여성운동의 양대산맥을 형성하였다. 김필례 김함라 유각경이 이화학당 출신의 김활란 등과 함께 1922년 3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를 발기하며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은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특히 김마리아(1884-1945)는 이화여고의 유관순처럼 정신여고가 자랑하는 민족운동의 상징이다.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서 광산김씨 김윤방의 세 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김윤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공동체로, 정동장로교회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소래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삼촌인 김윤오와 김필순은 김구 안창호 등 민족지사들과 막역하게 교류하며 계몽운동에 힘쓰던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모인 김구례(서병호의 부인) 김순애(김규식의 부인) 김필례와 언니인 김함라(남궁혁 목사의 부인) 김미렴 또한 모두 정신여학교를 나와 민족운동에 헌신한 여성지도자들이었다.

이렇게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으로 충만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김마리아는 1910년 고모와 언니들의 뒤를 이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 일본 동경여자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졸업을 얼마 앞둔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 민족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었다.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 직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5개월간 복역하고 나온 뒤, 1919년 10월 전국에 산재한 여성 비밀결사들을 통합하여 3.1운동 직후 최대 규모의 항일 여성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사진 19> 정신여고의 정신적 지주 김마리아

우리 머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마리아의 이미지는 바로 이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던 당시 그녀의 모습이다. 1919년 11월 일경에 다시 검거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그녀는 재미대한애국부인회(槿花會)를 조직하여 계속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여자 안창호'였다고나 할까. 그녀는 독립운동계의 여성 거물로서 1933년 귀국하여 원산 윌슨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1944년 숨을 거둘 때까지 민족의 독립과 여성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데 여성의 힘을 모아 민족의 독립을 이루는 데 집중하였던 김마리아의 여성운동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던 YWCA의 여성운동과 구별되는 바가 있었다. 여기서 일제하 정신 학맥과 이화 학맥 여성운동의 서로 다른 뿌리를 찾는다면 너무 지나친 도식화일까. 아무튼 예원학교 교정의 정동장로교회․정동여학교 자리에 서서 100여년전 새문안교회의 창설에 참여하면서, 정신여고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기독교 선교와 여성 독립운동에 기초를 놓았던 김윤방 김마리아 부녀, 그리고 소래 김씨 일가의 자취를 한번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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