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5일 서울의 CGV 인디라인과 씨네큐브, 중앙시네마, 명동 CQN 등에서 소규모로 개봉한 <플루토에서 아침을>이 개봉 3주차가 지난 지금 입소문이 퍼지며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심지어 매진 사태에 보조의자에 앉아서 보는 불편을 감내할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소수 관객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플루토에서 아침을>의 개봉을 계기로, 이 영화를 연출한 닐 조단 감독의 영화인생을 정리해 본다. |
미국 외의 곳에서 나고 자란 많은 감독들이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받고 헐리웃에 입성했다가 실망스러운 작품을 찍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 한결 성숙하고 노련한 작품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곤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개봉한 <판의 미로>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도 그렇지만, 심지어 누구나 헐리웃의 대표적인 감독이라 여겼던 폴 버호벤 감독 역시 <할로우맨> 이후 자신의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가 6년만에야 신작 <블랙북>을 내놓았다. 사실 이쪽 계보에 속하는 감독들은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중에는 심지어 천하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평생 '살리에르 컴플렉스'를 안겨준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도 포함돼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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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조단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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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개봉한 <플루토에서 아침을>의 감독 닐 조단은 약간 다르다. 혹자들은 닐 조단이 <천사탈주>의 실패 후 <크라잉 게임>으로 재기한 것이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반쪽의 성공 이후 <푸줏간 소년>으로 명성을 회복했다는 점을 들어 닐 조단 역시 '힐리웃에 데인 후 고국으로 돌아가 제정신 차린 감독' 계보로 넣고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닐 조단의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오히려 유럽과 미국을 종횡무진하며 영화를 찍는 가운데에 틈틈이 아일랜드 영화를 찍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성공시킨 뒤 다시는 저예산 컬트영화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피터 잭슨과도 다르며, 헐리웃에 치를 떨면서 자신의 고국에서 작은 영화만을 만들기를 고집하는 숱한 감독들과도 다르다. 닐 조단의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는, 그가 다국적 영화 자본을 거부하지 않고 그만큼 상업적인 다양한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각인과 개성을 새겨넣는다는 데에 있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애초 첫 영화의 데뷔부터 영국과 아일랜드의 합작영화를 찍었던 그는 이후 쭉 영국의 영화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에 따라 헐리웃은 물론 프랑스와 캐나다 영화사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감독이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이 원한다면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배우들만을 데리고 저예산의 작은 영화를 찍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닐 조단의 영화들 중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들은, 데뷔작 이래 그의 페르소나가 되어온 스티븐 리아(최근에 <리핑 - 열 개의 재앙>과 <브이 포 벤데타> 등에도 출연했다)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찍은 작은 영화들이다. <크라잉 게임>과 <푸줏간 소년>, 그리고 <플루토에서 아침을> 같은 영화가 그런 영화다.
. 감독이기 이전에 이야기꾼 올해로 쉰 다섯 살이 된 닐 조단은 영화감독이 되기 이전에 이미 소설가로 기대를 한몸에 모은 재능있는 이야기꾼이었다. 팻 오코너 감독의 TV 시리즈나 존 부어맨 감독의 <엑스칼리버> 등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던 그는 서른 두 살이던 1982년 직접 쓴 각본으로 스티븐 리아를 주연으로 내세워 <앤젤 Angel>("대니 보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을 만들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밴드매니저와 여자친구를 살해한 살인범을 뒤쫓는 색스폰 주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존 부어맨이 총제작을 맡았고, 닐 조단은 재능있는 신인감독으로 주목을 받았다. 2년 후 전통적인 서구 기담인 늑대인간을 소재로 한 <늑대의 혈족 The Company of Wolves>은 독특한 비주얼로 찬사를 모으며 유럽 내에 컬트팬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닐 조단이 미국과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친 것은 세번째 영화, <모나리자 Mona Lisa>(1986)를 통해서다. 출소 후 다시 암흑의 세계에 돌아가 고급콜걸의 운전사로 일하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모나리자>는 주연을 맡았던 밥 호스킨스에게 깐느영화제 남우주연상은 물론 영국아카데미영화제와 골든글로브, 런던비평가협회, 뉴욕비평가협회, LA비평가협회, 전미비평가협회의 남우주연상을 싹쓸이해서 안겨주었으며, 닐 조단은 헐리웃 진출의 기회를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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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잉 게임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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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오툴과 제니퍼 틸리 등의 배우를 기용해 <유령호텔 High Spirits>(1988)을 만든 후, 이듬해 헐리웃에 간 닐 조단은 로버트 드니로와 숀 펜, 드미 무어와 같은 스타들을 캐스팅해 <천사탈주 We're No Angels>(1989)를 만들게 된다. 얼결에 탈옥하게 된 두 남자가 성직자 행세를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이 영화는 그러나 흥행에서 참패했고, 좋은 평가도 받지 못했다. 헐리웃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문제도 있었겠지만, 언제나 자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작업해온 닐 조단으로서는 처음으로 다른 이의 각본(원래 유명한 뮤지컬 작가인 샘 스페웍, 벨라 스페웍 부부의 뮤지컬 원작을 데이빗 마멧이 시나리오로 각색했다)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것이 닐 조단에게는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첫번째 헐리웃 진출이 실패한 순간, 그는 망설임없이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생모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두번째 이별 The Miracle>(1991)을 내놓아 순식간에 명성을 회복하고,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에 초청을 받는다. 그러나 닐 조단이 자신의 명성을 온전히 회복한 것은, 자신이 죽인 흑인 영국병사의 애인을 찾아나선 IRA 비밀요원의 혼란과 사랑을 다룬 그 다음 영화, <크라잉 게임 The Crying Game>(1992)이었다. 닐 조단 특유의 기묘한 블랙 유머가 녹아들어있는 이 영화는 포레스트 휘태커와 미란다 리차드슨, 그리고 스티븐 리아의 걸출한 연기와 제이 데이비슨의 신비로운 매력이 어우러져 전세계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늑대의 혈족>부터 국내에 꾸준히 영화가 개봉됐음에도, 한국의 관객들이 닐 조단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하게 된 계기 역시 바로 <크라잉 게임>을 통해서였다. 영국아카데미시상식 7개 부문,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이 영화는 각종 비평가협회와 영화제에서 무수한 상을 타며 닐 조단을 스타 감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닐 조단에게는, <천사탈주>의 실패를 씻을 두번째 헐리웃 진출기회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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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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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 그리고 신예 키어스틴 던스트 등을 기용해 만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Intervew with the Vampire>(1994)는 닐 조단의 열혈 지지자들에게는 분명 실망을 주긴 했지만 닐 조단의 이름을 전세계에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자인 앤 라이스에게 각색 작업까지 맡겨지면서, 올플레이어 타입인 닐 조단은 원작자와 갈등을 겪었고 영화의 제작에 깊숙이 관여하며 영향력을 넓혀가려던 톰 크루즈와도 자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미국적인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들에게 유럽인의 정취를 부여한 닐 조단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근대사회, 곧 신세계의 탄생과 발전을 이들의 눈을 통해 목격하게 하고 증언하게 함으로써 미국관객들의 호감을 얻으면서도, 미국의 소비자본주의적 속성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적 위트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세계적인 흥행 성공으로 이제 국제적 스타감독이 된 그는, 필생의 야심작 <마이클 콜린즈 Michael Collins>(1996)의 작업에 착수한다. 그의 데뷔작 <앤젤>에서 주연을 맡을 뻔했던 리엄 니슨이 마이클 콜린즈 역을 맡고,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배우들이 집합하고 당시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던 미국의 줄리아 로버츠까지 가세한 이 대형 프로젝트는, 애초에 아일랜드 독립군 역사에서 논란의 대상인 마이클 콜린즈를 다룬 만큼 완성된 영화 역시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전세계 관객들과 평론가들이 어떻게 반응하건, 이 영화를 통해 아일랜드 무장독립 투쟁을 옹호했던 그는 우연히 읽은 패트릭 멕케이브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해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1997)을 내놓는다. 정서적, 물질적으로 불안한 환경에 놓여 고군분투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소년의 이야기를 매우 경쾌하고도 빠른 속도로 따라잡으며 따뜻하게 응시하는 이 영화는 닐 조단식 블랙유머가 가장 만개한 영화이기도 하고, 닐 조단의 지지자들에게는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한때 내리막, <플루토..>로 재기 이후 닐 조단의 행보는 다소 내리막길로 보인다. 원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인 드림즈 In Dreams>(1999)는 평단의 가혹한 혹평을 받았고,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줄리앤 무어와 레이프 파인즈를 기용해 같은 해에 개봉된 <사랑의 슬픔 - 애수 The End of the Affair> 역시 그리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1950년대에 데보라 카를 주연으로 했던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버전은 그리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닐 조단의 버전은 드리트릭 감독의 버전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사랑의 슬픔 - 애수>가 받은 냉대에도 불구하고, 닐 조단은 원작이 있는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작업에 큰 매력을 느낀 게 분명하다. 그 다음에 찍은 영화는, 무려 프랑스 범죄누아르의 거장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닉 놀테와 함께 유럽 각국의 배우들, 심지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까지 배우로 참여한 <굿 씨프 The Good Thief>(2002)는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원작과 또다른 매력을 갖춘 영화로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소규모로 개봉하며 주목할 만한 흥행성적을 내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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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에서 아침을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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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내놓은 오리지널 아일랜드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은 미국의 평단과 관객들에게서는 그리 좋을 평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가, 닐 조단이 <크라잉 게임>과 <푸줏간 소년> 시절로 되돌아갔으며, 그 특유의 블랙유머와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닐 조단의 최고 걸작은 아닐지언정, 닐 조단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중 하나로는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트랜스젠더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보며 <크라잉 게임>을 떠올리지만, 정작 닐 조단은 이 영화가 <푸줏간 소년>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는 영화임을 강조한다. (<플루토에서 아침을>의 원작은 <푸줏간 소년>의 원작을 쓴 패트릭 맥케이브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혼란과 고난의 시기를 특유의 상상력과 처절한 웃음으로 용감하게 정면돌파 해버리는 패트릭 키튼(킬리언 머피가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의 모습은, <푸줏간 소년>에서 결국 살인을 저지름에도 결코 미워할 수 없었던 명랑한 악동소년 프랜시(천재 소년 이몬 오웬즈의 경악할 만한 연기!)와 놀랍도록 닮았다. 차라리 웃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의 무시무시한 고통을 처절한 웃음과 낙천성으로 헤쳐나가는 패트릭 키튼과 프랜시의 모습은 닐 조단의 따뜻한 시선과 유머감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이다. "코미디엔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 밝히는 닐 조단이지만, 그의 블랙유머만큼은 그 어느 감독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독창성과 삶에 대한 진한 애착을 드러낸다. 언제나 괴물들과 괴물같은 사람들에게 매혹되어 왔다는 닐 조단 감독은, 그의 고백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고싶어 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크고 이들을 지속적으로 다루어왔기에, '영화'라는 환상의 도움을 받아 현실을 가로지르는 전세계 수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그토록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닐 조단은 현재 다시 헐리웃에서 조디 포스터를 주연으로 올 가을 미국 개봉 예정인 범죄 액션 영화 <브레이브 원 The Brave One>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SF와 호러가 뒤섞인 <축제열에서의 살인 A Killing on Carnival Row>을 후속작으로 찍을 예정이라 발표한 상태다. 아무렴, 데뷔작부터 곰곰이 따져보면 닐 조단의 영화는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렵다고는 해도 언제나 기본적으로 범죄와 액션이 섞인 누아르이자 스릴러 영화였다. (심지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도 누아르적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는가.) 헐리웃에서 이미 시행착오를 겪을 대로 겪어본 닐 조단 감독인 만큼, 그리고 그의 재능과 장점들이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플루토에서 아침을>에서 보여준 만큼 그의 신작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쩌면 영화인생의 전성기를 이미 여러 번 맞았지만 어쩌면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이 재능있는 감독을 너무 일찍 잊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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