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을 포함한 국회 내 제정파가 11일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중 개헌 발의에 반대 입장에 합의했고 청와대가 이를 일정부분 수용함에 따라 그동안 정치권에 숱한 논란을 뿌려온 임기 내 개헌은 사실상 폐기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당이 주도한 개헌 발의 유보
청와대가 개헌안 발의에 대한 조건부 유보 결정은 실질적으로 개헌안을 논의하고 심의 표결해야 할 주체인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의를 강행할 경우 오기로 비쳐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열린우리당이 임기 중 개헌 반대 입장에 가담하면서 청와대는 무의미한 발의에 대한 책임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열린우리당은 즉각 환영했다. 이기우 원내공보부대표는 "청와대가 유연한 자세를 보여준 것에 대해 의미 있게 평가하고 환영한다. 이제 국회와 청와대 사이의 대화를 통해 바람직한 결론이 도출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개헌안 발의 시점을 '일시 유보'한 청와대의 입장을 '발의 포기'로 굳혀버린 셈이다.
게다가 이날 오전 원내대표 6인의 전격적인 합의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서도 열린우리당의 적극성이 두드러졌다. 이 부대표는 "우리가 이 합의 사항을 수세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전향적이고 긍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합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나라당 등 5당의 요구에 떠밀렸거나 다른 요구와 맞교환 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장영달 원내대표는 "한미 FTA 비준과 대선 등 현안이 많으니 대통령께서 양보해주십사 하는 차원에서 당 지도부와 의견교류를 거쳐 내린 결단"이라고 이날의 합의안이 적어도 우리당 지도부 내에선 충분한 사전 교감을 거쳐 나온 결과임을 시사했다.
요컨대 개헌 추진을 뒷받침해야 할 유일한 세력인 열린우리당 내에서 이미 개헌 유보에 대한 의견이 모아졌고, 이것이 원내대표 회담의 합의문 형식으로 공식화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청와대와 교감?
청와대에도 사전에 이 같은 입장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 대표는 "며칠 전 문재인 비서실장에게 개헌발의 유보에 관한 생각을 전달했고 '한 번 고민해보겠다'는 답변을 받았으나 그 뒤로는 별도로 논의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개헌안 발의 철회의 형식은 다소 달라졌다.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은 지난 주 회동을 갖고 노 대통령이 각 당 대표들과 만나 한미 FTA와 남북관계 모색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는 대신 개헌 문제는 국회의 소관사항으로 넘기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FTA 특수'로 지지율 상종가를 친 노 대통령의 지지율 관리의 흔적도 엿보였다. 한미 FTA로 지지율 반등 효과를 본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를 철회해 지지율 굳히기를 시도,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이어지는 임기말 국정운영에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개헌안 철회를 주도하고 열린우리당이 뒷북을 칠 경우 우리당의 처지가 난감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우리당이 주도하고 청와대가 수용하는 모양새로 변모됐다는 후문이다.
우리 "당론 결정하겠다"
그러나 청와대가 '조건부 유보' 방침을 밝힘에 따라 임기 내 개헌 발의 카드가 완전히 폐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남은 문제는 정치권이 청와대가 다시 요구한 대로 "정치적 협상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을 수 있느냐다.
최소한 한나라당의 당론 결정,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구두약속까지는 뒷받침돼야 개헌안을 철회하겠다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열린우리당 최재성 대변인은 "우리당은 당론을 만드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최 대변인은 "오랜만에 정치권이 합의하고 결단한 것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전향적인 입장을 각 세력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다른 당의 협조를 당부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기우 부대표는 "국회 내에 정식으로 개헌문제연구위원회나 개헌추진위원회 설치를 제안한다"고 적극적인 국회 논의를 약속했다.
한나라 "조건 없이 철회해야"
그러나 개헌 전선에서 노 대통령과 대척점에 선 한나라당이 청와대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당론 결정 과정을 밟을지는 불투명하다. 나경원 대변인은 청와대의 입장에 대해 "정치권의 합의와 건의를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해석된다"면서 "청와대는 개헌안 발의 의사를 조건 없이 철회해야 한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 대변인은 "이미 한나라당은 다음 대통령의 임기 중 개헌을 완료하도록 노력하며,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하도록 뒷받침 할 것을 약속했다"면서 "이것으로 청와대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은 충족된 것이지만 청와대가 다시 조건을 달아 공을 정치권으로 떠넘긴 것은 입법부를 상대로 기싸움을 벌이자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대선주자 쪽도 반응이 비슷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쪽의 박형준 의원은 "개헌은 차기정부에서 논의하는 게 옳다"고 원론적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도, 정작 공이 넘어온 임기단축 문제 등에 대해선 "안정적인 개헌 논의를 위해서라도 차기 대통령에게는 5년 임기가 보장되는 게 맞다"고 밝혔다.
박근혜 전 대표 쪽도 "박 전 대표는 원칙적으로 4년 중임제가 합당하다는 입장"이라고 재확인하면서도 "임기 문제 등 세부적인 문제는 지금 단계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그는 "개헌은 한 명의 정치인이 하자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먼저 후보가 된 후 당과 협의를 통해 당론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대통령 당선 이후 안정적으로 추진해 가는 게 맞다"고 밝혔다. 청와대에 요구에 대해선 조속한 답변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한나라당과 대선주자들의 이같은 반응은 개헌안 발의가 사실상 폐기 수순으로 접어든 이상, '정치적 협상'을 고리로 개헌 논의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단속하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민노당 김형탁 대변인도 "임기 중 개헌발의 유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피하고 언제든지 발의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유감이다. 노 대통령은 좀 더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기 바란다"고 청와대의 '꼼수'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발의 직전 U턴해 원점으로 돌아간 개헌논의는 각 당의 개헌관련 입장과 로드맵, 대선주자들의 입장 타진 및 대선 공약화 여부 등을 둘러싸고 다시금 청와대와 정치권 간의 '정치게임'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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