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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ㆍ일제ㆍ해방의 역사현장, 헌법재판소 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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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개항ㆍ일제ㆍ해방의 역사현장, 헌법재판소 구내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北村일대 역사공간⑥

가회동사무소에서 지하철 안국역을 향해 쭈욱 내려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헌법재판소의 웅장한 건물이 우리를 반긴다. 북촌에서 어디 안그런 곳이 드물지만 재동 헌법재판소 구내 또한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 시대의 변화에 상응해서 각각의 역사적 속살을 드러내는 곳이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개화파의 산실 역할을 하였던 박규수의 집터가 있었고, 1880년대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하던 정부의 특별기구 외아문과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홍영식의 집 또한 그와 이웃해 있었다. 이후 홍영식의 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문을 열었고, 일제하에는 한성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여학교(오늘날 경기여고의 전신)가 그 뒤를 이었다.

3ㆍ1운동의 총연출자였던 최린의 집과 신간회 초대회장 이상재 선생이 숨을 거둔 집도 지금의 헌법재판소 구내 지하주차장 입구에 있었다. 그리고 해방직후에는 이곳 경기고녀 강당에서 1945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여운형과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 세력들이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사진49> 헌법재판소 전경

***개화파의 산실 박규수 집터**

개화파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박규수의 집 사랑방은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白松)이 있는, 지금의 헌법재판소 서북쪽 빈터에 있었다. 이에 대해 민족주의사학자 문일평은 “재동 여고숙사(경성여고보 제2기숙사)는 옛날 유명한 박정승의 집터이다. 그 뜰에 있는 백송은 수령이 육백년쯤 된 조선에 드문 진목(珍木)으로 본디 박정승집 중사랑 뜰에 섰던 것이다. 박정승은 이름이 규수요 호는 환재(瓛齋)니 대문호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또 그의 사랑방을 드나들었던 박영효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신사상(개화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伯兄: 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

이렇게 뒷날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재동 박규수 집 사랑방에 모여 <연암집>과 서양의 정치ㆍ경제ㆍ역사ㆍ지리ㆍ풍속 등을 소개한 중국의 신서적들을 읽으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사진50> 재동 백송, 개화파의 산실인 박규수의 집터이다.

박규수가 이 곳에 언제 자리잡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 뒤에 翼宗으로 추존)와 교유할 당시 그는 계산(桂山: 계동) 언덕에 있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옛집에 살았다고 한다. 이 때 효명세자가 친히 그의 집을 찾았다는 기록이 행장(行狀)에 나온다.

그런데 박영효는 박규수의 집이 재동에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고, 행장에도 병자년 12월 27일(양력 1877년 2월 9일) 북부 재동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곳 재동에서 말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재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대략 1869년 4월 평안감사에서 한성판윤으로 영전되어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 추정된다. 북학파(北學派)의 태두로 실학사상의 꽃을 피웠던 할아버지처럼 그 또한 이 곳에서 개화사상의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사진51> 1880년대 전반 외아문이 있었던 헌법재판소 청사

한편 지금의 헌법재판소 청사 자리에는 1880년대 전반 정부 초기 개화정책의 주요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외아문(外衙門)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개항과 더불어 만국공법(萬國公法)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세계질서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에 걸맞게 근대적 외교통상 업무를 담당할 정부 직제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1881년 1월 개화 사무를 담당할 특별부서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고, 뒤이어 내아문과 외아문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외아문이 자리한 곳이 여기 민영익의 집이었다. 그리고 외아문 북쪽 두번째 집에는 갑신정변의 깃발을 올렸던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주인공 홍영식이 스승인 박규수와 담을 마주하며 살고 있었다.

***홍영식의 집터와 광혜원의 개원**

갑신정변의 무대가 되었던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주인공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구내 서북쪽 빈터에 있었다.

1885년 4월 홍영식의 집에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면서 외아문에서 서울 4대문과 종각에 게시한 ‘고시문’을 보면, 그 위치를 ‘한성 북부 재동 외아문 북편의 두번째 집’이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재동 백송 북쪽의 빈터 자리다. 그러니까 현재 헌법재판소 청사 정면 오른편에 있는 ‘광혜원 터’(홍영식 집터)라는 표지석의 위치는 잘못된 것이다.

<사진52> 재동 백송 북쪽의 홍영식 집터 (+ 52-1 홍영식 사진)

홍영식은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아들로, 박규수와 유홍기 문하에서 개화사상의 세례를 받고, 과거에 급제하여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 외아문 참의와 협판, 미국으로 가는 사절단[報聘使]의 전권부대신, 우정국 총판 등을 두루 거치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일선에서 이끌어 나갔던 개화파의 촉망받는 신진관료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후 청국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 홍순목마저 자결을 하면서 그의 집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들어섰다. 그런데 광혜원의 설립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입국한 알렌이 우정국 사건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준 것이 그 계기가 되었으니, 실로 기이한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진53> 개원 당시의 광혜원(제중원) 모습

아무튼 알렌은 조선정부로부터 병원 수리비와 경상비 일체를 지원받고, 4월 10일부터 진료를 시작하였다. 병원 이름은 4월 14일 광혜원으로 정했다가, 1주일 뒤인 4월 21일 제중원(濟衆院)으로 다시 바꾸었다. 당시 제중원은 약 40개의 병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후 진료업무가 번창하자 1886년 가을 공간을 넓혀 구리개(銅峴: 지금의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 동편)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일제하 과거 외아문 청사를 포함한 이 일대에는 오늘날 경기여고의 전신인 한성고등여학교가 들어섰다.

***경기여고와 그 주변**

한성고등여학교는 1908년 4월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여자 중등학교였다. 설립 당시 교사는 지금의 종로구 도렴동에 있었는데, 1910년 8월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의 목조 2층건물로 이전을 하였다. 그리고 1911년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 4월 설립된 부속보통학교가 재동 교사를 사용함에 따라 지금의 종로경찰서 자리로 옮겼다가, 1922년 4월 재동에 2층 벽돌로 된 교사를 신축하고 다시 입주하였다.

1938년 4월 경기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꾼 경기여고는 해방이 된 뒤 1945년 10월 정동 1번지의 일본인 여학교 자리로 이사를 가는데, 그 바로 전인 9월 6일 여운형과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이 학교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격동의 역사현장이 되었다.

<사진54> 경기여고의 전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

그 뒤 창덕여고에서 1949년부터 교사로 사용하다가 1989년 방이동으로 이전한 이후, 1993년 6월 헌법재판소가 이 곳에 청사를 신축하고 입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헌법재판소 구내 지하주차장 입구, 과거 재동 68번지의 60평쯤 되는 땅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의 집이 있었다. 비록 뒤에 친일파로 변절하기는 했지만, 당시 그는 이 집을 근거로 3ㆍ1운동의 기획과 연출을 도맡아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1922년 말부터는 신간회 초대회장을 지낸 이상재 선생이 세들어 살다, 1927년 3월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이렇게 헌법재판소 구내는 개항기에서 일제하, 해방후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했던 역사의 현장이자, 서양의학과 여성교육의 꽃을 피운 문화의 공간이었다.

<사진55> 헌법재판소 지하주차장 입구의 최린ㆍ이상재 집터

***북촌기행을 마치며**

조선조 집권양반들의 주거지로 북촌은 조선시기 정치사의 이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곳이자, 한국 근현대 민족운동의 흐름과 그 결을 같이 했던 중심적인 역사현장이었다.

요즈음 북촌 한옥마을의 보존 문제가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본다. 그러나 북촌은 단지 전통 양반가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문화공간으로서 뿐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의 산 증인으로서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역사현장이다. 북촌의 보존이든 개발이든 사업에 착수하기에 앞서 이러한 점들을 먼저 고려했으면 한다. 특히 건준 창립본부 건물의 철거와 같은 사태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끝으로 북촌 초입에 문화장승이라도 하나 세워, 북촌의 역사현장과 문화공간들을 한 눈에 담고 머리에 그리며 기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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