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직전 전해진 노동자 분신 소식
이 자리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행사가 열리기 전, 민주노총 조합원 허 모 씨가 "망국적 한미 FTA 폐지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탓이다.
행사장을 둘러싼 경찰의 표정에도 긴장이 흘렀다. 당초 경찰은 5000여 명의 전·의경을 서울 광장에 배치했으나, 허 씨의 분신 사실이 알려지자 8000여 명으로 병력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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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연대 정보선 문예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대체로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특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시민이 이날 촛불문화제를 위해 1000여 개의 종이컵에 일일이 구멍을 뚫어 제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몇몇 참가자는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행사장의 분위기는 류은숙 서울여성회 준비위원장이 자작시를 낭송할 무렵 더욱 고조됐다.
류 위원장은 허 씨의 분신 사실을 접한 뒤 쓴 시를 읽어가다, "촛불 앞에 선 우리 모두 / 신발끈 고쳐 매어야 할 때이다 / 곡기 끊어 오로지 뜻을 지키던 양심들이여 / 그리하여 그 밥심으로 / 온 거리를 성난 함성으로 메워 / 바람에 춤추는 깃발들로 / 절로 흥이 나 어깨 들썩이는 농부의 신바람으로 / 뱃심 든든한 희망으로 일터를 지키는 당당한 노동자의 주먹으로 / 이제 우리들의 봄을 노래하자"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목에서 행사장 맨 앞에 앉아 있던 한 참가자는 "이제 단식을 끝내고, 싸워야 할 때"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난하게 자란 대통령,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다"
이어 연단에 선 영화감독 정윤철 씨는 "가난하게 자란 분이 대통령이 됐을 때, 품었던 기대는 이제 사라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 감독은 "노무현 대통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영화 캐릭터로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이다"라며 "노 대통령이 추진하는 한미FTA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를 더욱 크게 만든다. 싸워야 한다. 앞으로 여기 모일 일이 많아질 것 같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우리나라의 희망이다"라고 외쳤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도 연단에 섰다. 심 의원은 "한미FTA 협상은 애초에 국민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진행된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독재자 탄핵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게 이익이 될지, 손해일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아니다"
한편 이날 서울광장 한 켠에서 행사를 지켜보던 대학생 송인식 씨는 "학교가 강원도 원주에 있는데, 촛불문화제에 참석하려고 서울까지 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송 씨는 "한 학기에 4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 부담으로 대학 사회는 이미 황폐화 됐다"며 "한미FTA로 교육시장이 개방될 경우, 치솟는 등록금 때문에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하지 못 하는 친구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 강석진 씨는 "한미FTA가 내게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 사실 잘 모른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 씨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이처럼 치열하게 반대하는데 정부는 왜 한미FTA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잘못된 것"이라며 "지난 대선에서 소탈한 이미지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을 찍은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청와대로 가자"…도심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시위
저녁 7시 반 쯤 시작된 이날 촛불 문화제는 두 시간 쯤 지나 끝났다. 그리고 9시 반 쯤 참가자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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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은 "한미FTA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각 역을 지나 안국동으로 향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도로 행진 과정에서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청와대로 가자"라고 외치는 참가자들을 경찰이 안국동에서 막았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경찰이 막자, 참가자들은 광화문, 사직 공원 등으로 흩어져 2일 새벽까지 계속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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