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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 소설이냐, 영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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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 소설이냐, 영화냐

[북앤시네마] 소설 [워싱턴 스퀘어]와 영화 <워싱턴 스퀘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와 아그니예츠카 홀란드 감독의 <워싱턴 스퀘어>의 원작소설인 헨리 제임스의 소설 [워싱턴 스퀘어]가 헨리 제임스 전공자인 임정명 씨의 번역에 의해 책세상에서 출간됐다. 현대 심리소설의 개척자이자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등과 함께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가로 여겨지는 헨리 제임스는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며 영미권에서는 가장 즐겨 읽히고 영화화되는 작가 중 하나다. [워싱턴 스퀘어]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평범하고 얌전하며 매우 수동적인 캐서린 슬로퍼는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매력적인 남자 모리스 타운젠트와 사랑에 빠져 약혼한다. 하지만 캐서린의 아버지가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이들이 결혼을 강행할 경우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모리스가 캐서린을 떠나버린다는 이야기. 이 단순한 이야기가 헨리 제임스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질 때, 소설은 구습에 짓눌려 욕망을 억압당하는 신대륙의 근대 여성에 대한 탁월한 사회 드라마이자 심리소설이 된다.
워싱턴 스퀘어

슬로퍼가 그토록 모리스를 반대하는 것은 모리스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윗감으로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모리스가 절대로 캐서린을 사랑할 리 없으며 캐서린이 받게 될 유산을 보고 캐서린에게 접근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그가 '모리스가 절대로 캐서린을 사랑할 리 없다'고 판단하는 근거에는 자신의 딸에 대한 굉장히 박한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캐서린에 대해 '매력은 하나도 없고 평범하며 아둔하기 짝이 없는 여성'이라 알게 되는 것은 이것이 전적으로 슬로퍼가 캐서린을 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슬로퍼는 이런 이유 때문에 딸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유산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데, 여기에는 딸의 행복이나 욕망 등에 대한 고려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슬로퍼는 심지어 자신의 사후에까지 캐서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자신이 죽더라도 모리스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는 캐서린에게 그는 결국 유산의 상당 부분을 다른 곳에 기부해 버림으로써 '처벌'을 가한다. 캐서린에 대한 슬로퍼의 권위적인 태도는, 캐서린이 아무리 그의 품위있고 지적인 수준과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는 평범한 여성이라 한들 한 개인에 대해 지나치게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슬로퍼에 대한 캐서린의 존경심은 그에 대한 두려움과 자발적인 피지배형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는 그의 방식에 있어서 캐서린은 정당한 상속녀라기보다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다른 정당한 상속자, 즉 사위를 혼인관계를 통해 찾기 위한 어떤 매개체 혹은 미끼의 존재로 전락하는 감이 있다. 즉, 남성의 재산은 남성에게 상속된다는 것이며, 친딸조차 정식 상속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렇기에 슬로퍼에게 있어 결코 자신의 후계자 – 상속자로 인정할 수 없는 모리스가 캐서린의 남편 후보로 나섰을 때 슬로퍼와 모리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은 결국 구세대 남성과 신세대 남성 사이 권력의 이양 과정에서의 다툼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캐서린은 이들 두 세대의 남성간 대립이 벌어지는 대리 전장터가 된다. 강력한 아버지에 의해 모든 욕망이 억압당하고, 동시대 다른 남성에 의해 재산 성취의 매개물로 전락하는 캐서린은, 그러나 이러한 다툼 속에서 구세대의 질서에 (다소 소극적인 방식으로나마) 저항하면서 자아에 눈을 떠간다. 그녀가 아버지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로 결심하면서, 그녀의 태도는 조금씩 변해가고, 특히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 그녀의 태도는 아버지에 대한 정신적 종속 관계에서 독립을 성취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리스와 결혼하는 것을 바라고 있던 게 아니었음에도 아버지가 요구하는 약속에 재산권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거부를 하고, 또 한편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찾아온 모리스에게 휘둘리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정치 영역에서 독립전쟁과는 별개로, 사회적 / 문화적 영역에서 신세계(미국)가 구세계 (유럽)의 문화적-사회적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 문화를 형성해가는 조용한 혁명의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이 되며, 이러한 구세계와 신세계의 가치의 충돌이야말로 헨리 제임스가 언제나 즐겨 다루던 주제였다. 다만 [워싱턴 스퀘어]가 제임스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특이한 점은, 캐서린이 이러한 '조용한 혁명'을 이룩하게 된 계기가 역설적으로 구세계, 즉 유럽 여행을 통해서라는 사실이다. 거의 전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져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프레시안무비

[워싱턴 스퀘어]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과 아그니예츠카 홀란드 감독에 의해 각각 1949년과 1997년에 영화화되었다. 국내에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연을 맡아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영화의 원제는 '상속녀'를 뜻하는 이다)은 바로 헨리 제임스의 [워싱턴 스퀘어]를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을 포함하여 총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이 중 여우주연상과 의상상, 음악상, 미술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아그니예츠카 홀란드 감독의 버전은 제니퍼 제이슨 리를 캐서린으로, 벤 채플린을 모리스로 내세웠는데, 아무래도 이 버전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 버전에 여러 모로 비할 바가 못 되는 게 사실이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이밖에도 숱하게 영화로 옮겨졌다. 모두가 잘 아다시피 니콜 키드먼을 주연으로 제인 캠피온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여인의 초상>이나, 헬레나 본햄 카터를 주연으로 이안 소프틀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 <비둘기의 날개>(국내에는 '도브'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역시 헨리 제임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서 유령의 존재를 감지하고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가정교사의 이야기를 그린 [나사못의 회전]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중 가장 많이 영화화된 소설로, 정말로 존재하는 유령을 목격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그녀의 환상에 불과한지를 모호하게 처리한 원작 덕택에 소설을 직접 영화화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령의 집' 모티브의 영화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나사의 회전]은 지금도 미국의 TV 혹은 유럽의 어딘가에서 영화화가 되고 있는 작품인데, 이중 가장 유명한 버전으로는 영국 프리시네마의 기수 잭 클레이튼 감독이 연출을 맡고 데보라 카가 주연을 맡은 <공포의 대저택>과,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이 연출하고 잉그리드 버그먼이 가정교사로 주연을 맡은 <나사못의 회전>이 가장 유명하다. 국내에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중 장편으로 [나사의 회전]과 [아메리칸], [애스펀의 러브 레터]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단편 모음집도 두 권이 번역, 출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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