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순리대로 다음 달이면 4월이다. 해마다 4월이면 제주에는 길거리와 들판마다 만개한 유채꽃과 흐드러진 벚꽃이 온 섬을 꽃내음으로 진동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는 달리 제주사람들의 가슴에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도 피어난다. '제주 4·3항쟁' 때문이다.
4.3항쟁은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미군정의 강압정책과 한반도를 조각내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제주도민들의 피어린 싸움이었다. 4.3항쟁으로 인해 정부 공식기록으로만 3만 명이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는 대략 27만 명이었다.
죽음의 의미를 단순한 숫자로 따질 수는 없지만 희생자 수로만 본다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한 그야말로 광기어린 '제노사이드(대량학살)'였다. 한 해 1000만 명이 왕래하는 제주국제공항도 알고 보면 학살의 현장이었다.
제주도는 '레드헌트'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정도로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 찍혔고 4.3은 80년대 금서목록처럼 50여 년의 세월 동안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
그러나 진실은 끝내 숨길 수 없는 것. 80~90년대 대학생들과 4·3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의 운동, 그리고 진실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제주지역 언론사의 땀방울이 어우러져 4.3항쟁의 역사적 실체들이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났다.
또한 이를 계기로 전 도민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 지난 99년에는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희생자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사과도 있었다.
필자는 지난해 7월 제주도의회에 들어온 뒤 제주도의회 역사를 뒤져볼 시간이 있었는데, 4.3항쟁과 관련된 제주도의회의 실천적인 노력에 감복했다.
90년대만 해도 4.3 관련 유인물이나 다큐멘터리에 '항쟁'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이니 '찬양고무'니 하는 법 적용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선배 제주도의회 의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4.3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특위를 구성하고 제주 곳곳을 돌며 피해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4.3 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선 도민들과 함께 역사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4.3항쟁은 내년이면 60주년이 된다. 벌써부터 도내 곳곳에서 60주년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필자도 제주도의원이라는 명함을 걸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거대한 4.3공원은 조성되고 있으나 여전히 4.3 후유 장애인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도민들의 가슴가슴 마다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을 터이다.
선배 도의원들이 닦아 놓은 터전 위에서, 아직도 가시지 않은 도민들의 아픔을 4.3항쟁 60년의 의미로 담아내는 데에 필자를 비롯한 도의회가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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