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사회 곳곳에서 과거사 청산 작업이 벌어지고 있으나 사법부는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왔다. 사법부가 최근 형식적으로는 삼권분립 체제의 독립 권력으로 되살아났다 할지라도, 과거의 오명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 권력의 정당성과 신뢰를 얻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사로 부푼 기대, 1년 6개월 지났는데…
그래서 지난 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의 취임사는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이 대법원장은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법부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고 반성했다.
이 대법원장은 특히 "그동안 사법부가 행한 법의 선언에 오류가 없었는지, 외부의 영향으로 정의가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봐야 하며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청산하고,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취임사를 듣고 느꼈던 '기대'는 취임 이후 1년 6개월이 지나는 동안 '실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취임사는 거창했지만, 이후 과거사 청산 방식에 대한 논란만 있을 뿐 눈에 띄는 후속작업이 없기 때문이다.
'멀고도 험난한' 재심 통한 과거사 청산
현재 제기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 방식에 대한 논의는 크게 '사법부 내 과거사 청산위원회를 설치'(위원회), '과거 판결을 무효화하는 특별법 제정'(입법), '재심강화를 통한 판결 정정 및 판례 재정립'(재심) 등 크게 세 가지다.
과거사 청산위원회를 설치하거나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식에 대해 사법부는 "법률적 판단을 정치적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문제 등을 이유로 현실성이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법부는 재심을 통한 과거사 청산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고 있으며, 그간 재심사건이 대법원에 상고되면 대법원 판결문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 및 판례 변경을 통해 과거사 청산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재심을 통한 과거사 청산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지난 1월 재심 판결을 통해 '무죄'가 선고돼 큰 화제를 모았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 재심 신청(2002. 12)에서 재심 결정(2005.12), 1심 무죄판결(2007.1)이 내려질 때까지 무려 4년 2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러다보니 1심 무죄 판결 이후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다. 유가족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법원 판결을 통한 과거사 청산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재심 사유가 까다로워 무혐의를 입증하거나 수사 과정에서 불법감금과 고문과 같은 불법행위를 받았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데, 일반인들로서는 이를 찾아내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실제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 재심이 이뤄지는 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 진실위와 같은 공신력을 지닌 기관에서 밝혀낸 자료가 큰 역할을 했다.
이번 인혁당 판결에 앞서 간첩혐의로 불법연행·감금돼 고문을 당한 뒤 15년형을 받아 15년을 꼬박 옥살이한 신귀영(71) 씨의 경우 2번이나 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지만, 모두 상급심에서 좌절당한 것만 봐도 재심을 통한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법부가 '재심을 신청하면 그 때 보겠다'는 현 자세를 유지하는 한 "과거사 청산의 의지가 없다"는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
사법부는 '재심 특별재판부' 설치하고, 검찰도 진상규명 나서야
따라서 사법부가 지난 과오를 진정 반성하고 있다면 '재심 특별부'를 설치해 재심 사건에 대한 집중 심리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판사 1명이 1년에 3500여 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현실에서 재심 사건을 집중 심리하는 '특별부'를 설치해 신속한 재판과 재심 사건에 대한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 특히 재심 대상으로 분류되는 사건이 대부분 20~40년이 지난 사건으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많은 '재심 대상' 사건 피해자들이 사망했고, 또 많은 피해자들이 고령이어서 시간이 많지 않다.
또 재심의 실효성을 얻기 위해서는 검찰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재심이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법률적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증거조사가 필요한데, 법원의 직권조사 명령만으로는 강제성이 없어 조사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검찰이 나서야 한다.
과거 '메모 재판'의 주범은 판사 뿐만 아니라 검사도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검찰 역시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준사법기관'을 주창하고 있지만, 과거 검찰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공안기관원에게서 모진 고문을 받다 검사 앞에 불려가 '나를 보호해주겠지'라는 피해자들의 바램을 무참히 짓밟은 당사자들이 검사들이었다. '사법부 과거사 청산'이 담장넘어 법원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진실화해위 김갑배 상임위원(변호사)은 "피해 당사자들이 재심청구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형사소송법상 재심청구의 자격이 있는 검찰이 사법부의 암울했던 과거에 책임이 있는 만큼, 재판에서의 승소에 집착하지 말고 공익의 대변자로서 재심 청구와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력의 시녀' 된 구조 밝히는 것도 과거사 청산이다"
결국 사법부는 "대법원에 올라오면 입장을 표명하겠다"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대법원에 사건이 올라오도록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검찰의 협조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특별법을 만들거나 현행 법률을 개정하지 않아도 실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법원의 의지만으로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가 '재심'이라는 법률적 행위로만 청산할 수 없는 과거사가 있다. 바로 과거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듣게 했던 권력 종속의 구조를 밝히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선 '과거사 청산위원회' 설치 등이 검토돼야 한다.
한상희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건국대 법학과 교수)은 "진실을 밝혀내고 이 진실의 이면에 존재할 수 있었던 권력과 이익의 문제들을 규명해 이를 척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과거사 청산의 또 다른 목표"라면서 "과거사를 생산해 낼 수 있었던 사법의 구조와 체계 혹은 이를 둘러싼 정치구조 그 자체의 왜곡지점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소장은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 사법의 정치성은 청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과 신뢰의 회복은 민주화 과정에서 '무혈 입성'한 법원의 최소한의 역사에 대한 책무이고, 앞으로 사법부가 진정한 '국민을 위한' 법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미래적 의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실현 가능한 방법마저 외면한다면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회복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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