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큰 별이 졌다.
국창(國昌) 박동진옹이 향년 87세로 8일 타계했다.
박 명창은 이날 아침 9시쯤 충남 공주시 무릉동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에서 실신해 119구조대가 공주의료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별세했다.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판소리 명창들을 비롯한 국악계 관계자들은 "너무나 큰 별이 졌다"며 애통해 했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안숙선 명창은 "이 시대 소리를 지켜주시는 어른들이 하나 둘씩 가시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며 "그 분은 국악 대중화를 위한 최전선에 계시면서 판소리계의 씨를 뿌리신 분"이라고 평했다.
조통달 명창은 "박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늘 귀감이 되셨던 분"이라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앞이 캄캄해진다"며 슬퍼했다.
<사진- 박동진 명창>
***68년 최초 완창공연으로 국악부흥 앞장 서**
고인은 1916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김창진, 정정렬, 유성준, 조학진, 박지홍 명창으로부터 심청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와 흥보가 등을 두루 사사했으며, 중요무형문화제 5호인 ‘적벽가’ 기능보유자로 은관문화훈장, 문공부장관상, 서울시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1968년에 15분에서 20분정도의 ‘도막소리’(판소리 중 한 대목만 짧게 부르는 것)만 유행하던 국악계에 사상 최초로 5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열어 충격을 주며 사라져 가던 전통음악을 부흥시키는 기수역할을 했고, 이후 여러 명창이 판소리 완창을 공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고인은 이후에도 69년에는 고수를 5명이나 바꿔가며 8시간에 걸쳐 ‘춘향가’를 완창 했고 다음해에는 6시간에 걸쳐 ‘심청가’를 완창 했으며 71년에는 ‘적벽가’를 7시간에 걸쳐, 72년에는 ‘수궁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함으로써 전승하는 판소리를 모두 완창하는 초유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고인은 이런 성과에 힘입어 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적벽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적벽가’는 고인이 생전에 “어렵다”면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공연하기를 즐겼던 판소리로 “삼국지의 장수들이 싸우는 내용이라 소리가 크고 힘이 들지만 남성적인 매력이 넘친다”고 평했었다.
***"제비 몰러 나간다"**
고인은 우리전통 판소리의 보존 뿐 아니라 잊혀진 판소리를 복원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판소리의 창작하는 작업과 국악의 대중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70년에는 사설로만 전하던 ‘변강쇠타령’을 곡을 붙여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배비장전, 숙영낭자전, 옹고집전등의 사설을 정리하고 곡을 붙여 발표했다.
또한 73년에는 성웅 이순신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창작해 공연했고 80년대에는 예수의 일생을 판소리로 새롭게 만들었으며, 90년대에는 TV CF에 출연해 흥보가의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대목을 유행시키며 일반인들이 판소리에 친숙케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후학에 "박음소리 말고 내 소리 해라" 충고**
고인은 매번 공연을 할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지 않고 공연장 청중의 수준이나 분위기에 따라 상황에 맞게 즉석에서 사설을 짓고 작창을 하는 창조성과, 익살맞고 재미있는 아니리와 너름새의 즉흥성, 거칠 것 없는 재담과 육담 등으로 청중들을 한순간에 포복절도하게 하여 객석을 사로잡곤 했다.
하지만 고인은 “솔직히 백번 공연을 해야 한번 마음에 들까 말까 하는 정도”라며 공연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고인은 후학들에게 “선생에게 배운 대로 ‘박음소리’를 하지 말고 나에게 맞는 소리를 스스로 개발하여, 소리를 하되 내 소리를 내가 해야 한다”고 늘 충고했다.
정부는 8일 박 명창에게 국악발전과 보급에 크게 기여한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밝혔고, 국악방송(서울.경기 FM 99.1MHz, 남원 FM 95.9MHz)도 오늘부터 2주간 오후 7시부터 30분간 고인의 삶과 국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추모프로그램을 마련해 방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