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는 지난 11일 현행 예비군 제도 개혁의 밑그림을 드러냈다. 현재 3800여 개인 예비군 중대의 수를 2020년까지 2200여 개로 줄이는 대신, 훈련의 질을 높이고 관리인력을 정예화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국방부가 발표한 '국방개혁 2020'에 따른 예비전력 정예화 방안의 일환이다.
이런 밑그림을 발표하면서 국방부 관계자는 "예비군 규모를 줄이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예비군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방안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인구 감소로 인한 병력 감소, 예비군 조직의 비대화에 따른 사회적 낭비 등이 이런 계획의 배경이다. 결국 군사적, 경제적 효율을 높이는 게 이번 개혁 조치의 목적인 셈이다. 그리고 최근 정부가 내놓은 '비전2030-인적자원 활용전략'에 담긴 병역 제도 역시 비슷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조치에 대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국방개혁'은 다른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둔 채, 단지 군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진정한 국방개혁'은 군대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인 남성의 상당수에게 군 복무 경험을 안겨 주는 징병제로 인해 사회 곳곳에 스며든 군사문화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병영사회의 특징을 상당히 강하게 띠고 있다고 지적한다. 강제적인 군 복무 경험, 그리고 전역 이후에도 군대에서의 경험을 계속 상기하게 만드는 문화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군대 경험을 계속 되새김질하게하는 장치 중 하나가 '예비군 제도'다. 실제로 많은 성인 남성들이 "예비군복을 입는 순간, 군 복무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또 훈련 조교들이 예비군들에게 '선배님'이라며 존대하는 예비군 훈련장의 문화 역시 병영에서 경험한 서열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비군 제도의 진정한 개혁은 '예비군 폐지'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적 자원 투입에 비해 전력(戰力) 향상에 기여하는 바가 적다"는 이유로 '예비군 폐지'를 요구해 온 기존 주장과 다른 맥락에 있는 것이다.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하는 나동혁 씨도 병영사회의 문제점에 공감하면서 예비군 폐지를 주장해 온 이들 중 한 사람이다. 11일 국방부가 내놓은 예비군 제도 개편안을 접한 나 씨가 예비군 제도와 병영사회에 대한 평소 생각을 담은 글을 기고했다. 다음은 나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군복무기간 단축에서 예비군 제도 개혁까지
참여정부가 국방관련 개혁안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지난해 나온 '국방개혁 2020'에 이어 지난 5일, '비전2030-인적자원 활용전략'을 발표됐다. 내용을 살펴보면 △2014년까지 현역병 복무기간 6개월 단축 △첨단전력 분야 등 숙련병 확보가 필요한 분야에 '유급지원병제' 도입 △전의경과 경비교도, 산업기능요원, 공익행정요원제도 폐지,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복무하는 '사회복무제' 도입 등이 주요 골자다.
저출산·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2010년부터 노동력 부족이 현실화될 것이므로 다가올 인력부족 현상에 대처하려면 보유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취지다. 참여정부가 전부터 강조해 오던 국방개혁의 큰 방향과 맥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이런 취지에서 참여정부는 지난 11일 예비군 제도 개혁안을 추가로 제시했다. "'국방개혁 2020'에 의한 예비전력 정예화 계획에 따라 현재 300만 명인 예비군을 2020년까지 150여만 명 수준으로 줄이기 위해" 읍·면·동 단위로 편성되어 있는 예비군 중대를 인근 시·군·구 단위로 통폐합하고, 대신 상근복무 예비역 간부 2600명 정도를 선발해 질적 향상을 꾀한다는 내용이다.
국방개혁안에 담긴 참여정부의 정신은 무엇인가
한 동안 '노무현 리플달기'가 온라인 공간에서 유행했었다.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따위의 리플을 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를 향한 냉소적 시선은 끝이 없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태도를 취하는 탓도 있다.
얼핏 보면 참여정부가 내놓은 국방 개혁안들은 부족하나마 과거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느낌을 준다. 이를 테면 '군복무 기간 단축'은 군사주의가 다소 완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다.
또 사회복무제도는 신체등급이 낮은 대상자뿐만 아니라 본인이 희망할 경우 여성이나 혼혈인, 귀화자, 고아도 복무할 수 있도록 규정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동시에 인력 활용의 다양성을 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기에 예비군 제도 개혁안은 참여정부가 구질서 타파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모든 구태의연한 것과 이별을." 항상 그렇듯 참여정부의 개혁안은 이런 명분을 달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참여정부가 국방개혁안을 마련한 취지를 살펴보자. 결국 '효율', 그리고 '국력'이다. 정책을 둘러싼 세련된 포장을 한 꺼풀 벗기고 나면 구태의연한 국가주의, 권위주의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경제성장 동력'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 국민의 예외 없는 병역의무 이행'이라는 군사 정권의 구호만 반복될 뿐이다.
참여정부가 지향점으로 내건 '인권', '평화', '탈권위'의 정신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사회복무제 적용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모든 사람이 군복무를 동등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기묘한 명제로 귀착됐다.
이런 점에서도 참여정부는 시민의 참여로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 국가의 권위와 국가주의적 일체감에 기대는 방식으로 회귀했다. 결국 화려한 수사를 제외하고 나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던 셈이다.
예비군 제도는 어떻게 탄생했나
참여정부는 종종 우리 사회가 '냉전시대 사고방식'과 단절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참여정부가 정말 '냉전시대 사고방식'을 극복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예비군 제도 개혁안에서도 이런 면모는 잘 드러난다. 이런 논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하려면 예비군 제도의 역사를 잠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접근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1.21 청와대 습격미수사건'이다. 곧 이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정국은 경색됐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본격적인 병영국가 건설 작업에 나선 것이다. 같은해 2월 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재향군인의 무장을 선언했다. 이어 같은해 3월 예비군 편성을 마무리했고, 4월 1일 향토예비군 창설식을 개최했다. 그리고 같은해 5월 29일, 향토예비군설치법을 개정·공포했다. (참고자료 : "의외로 '빡센' 예비군 훈련" <인권오름>)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향토예비군은 현재 3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수에 이르게 됐다.
극단적인 반공 분위기 속에서 창설된 예비군은 군사정권의 의도에 충실했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에 나온 이들을계속 훈육하는 반공교육의 장으로 기능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조직의 목적에 충실하게 따르는 집단성, 일상적인 폭력에 둔감한 태도를 교육하는 효과도 낳았다. 이런 사고방식을 군복무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체화시켜 온 사람들에게는 수시로 지난날을 상기시키는 복습 효과도 만만치 않다.
많은 이들은 이런 훈육 효과를 애써 무시하거나 아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일년에 그저 2~3일쯤 고생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회사에 안 가니 좋다"는 친구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어쩐지 훈련장에 가면 불편해진다"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군대식으로 돌아가고 사람들을 볼 때도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답답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예비군 훈련에서는 해마다 적들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정신교육이 진행된다. 법적으로도 예비군은 군형법의 적용을 받는 군인 신분이다. 언제든 국가가 원하면 군인이 되어야만 하고 총을 들어야만 한다는 현실을 계속 깨닫게 한다.
이런 것이 바로 병영국가의 작동원리다. 총은 들고 있지 않지만 군인 정신이 학교, 직장, 가정 등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인간관계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 다양성에 대한 인정보다는 획일적 가치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중요시하고, 민주적 절차와 과정보다는 일의 효율과 결과의 총량만 중요시하는 분위기는 이런 사회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까칠한 사람'이나 '반조직적 인간' 취급을 받게 된다. 알아서 기는 문화가 대부분의 조직 분위기를 압도한다.
요즘 드라마 '하얀거탑'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비슷하다.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권력과 재화의 수단으로 여기는 병원의 현실. 그 드라마에 얼차려 같이 낯익은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외과 의사들이 옥상에 불려가 단체기합을 받고 몽둥이로 두드려 맞는 장면을 외국인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한국에서는 의사도 맞고, 개그맨도 맞고, 학생도 맞고, 아내와 아이들도 많이 맞는다. 군대가 없는 나라는 거의 없지만 병영국가 한국에서 살아 온 사람들은 누구보다 강력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돼 있다.
집단적 상처의 재생산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라는 책이 있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비교문화정신의학을 전공한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집단적인 망각 상태를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집요하고 파고 들어간다.
인터뷰 대상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징집돼 만주 지역에서 군 생활을 했던 일본인들이다. 난징대학살과 태평양전쟁은 물론 731부대(흔히 '마루타 부대'라고 불린다)의 존재까지,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이 개인들의 증언 속에서 생생히 되살아난다. 난징대학살의 끔찍했던 밤, 일반인을 대상으로 삼는 생체실험, 초년병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어 살해당한 무고한 농민….
이 책은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살육에 무뎌져가는 과정, 그리고 전쟁 이후 가해의 역사를 망각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그 집단적인 망각과정이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로 나타나고, 결국 또 다시 일본사회가 오른쪽으로 기울어가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죄의식이야말로 우리들(일본사회)의 귀중한 문화이며, 진정으로 상처를 입는 데 익숙해진 사람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에는 한국 사회 이야기를 해보자. <대한민국은 군대다>의 저자 권인숙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자리가 있었다. 권 선생님이 심리학 관련 강의를 맡았는데, 마지막 시간에 자신의 내면에 남아 있는 가장 커다란 트라우마(심리적 내상)가 무엇인지 써내는 것으로 한 학기 강의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렇게나마 학생들이 속내를 털어놓게 된 것도 한 학기 수업의 결과라고 했다. 학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속내를 털어놓는 것을 어색해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을까? 남학생들은 80% 이상이 군대 관련 경험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학생들은 군대와 같은 압도적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소 분산되는 경향은 있었지만 30% 정도가 성폭력 내지는 유사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표현하지 못하고 잠재적으로 안고 있는 고통까지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외국의 경우, 이런 상처는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에게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비롯된 분노는 대개 상처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으로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직접 관계가 없는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로 발전하는 게 보통이다. 굳이 외국의 사례, 이론적인 근거 등을 들지 않아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병영국가가 탄생했다. 그래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서도 비슷한 상처와 욕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예비군 제도는 이런 상처를 반복해서 상기시키며 왜곡된 심리를 더욱 강고하게 만드는 장치일 따름이다.
군대의 존재는 대다수 성인 남성들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있지만, 역설적으로 세대를 넘어 국가주의적 욕망으로 질주하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국가주의와 군사주의의 앙상블
전쟁이 없어도 늘 전쟁 같은 일상을 사는 것. 이것이 군사주의다. 예비군 제도는 한국사회 일상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다. "여기는 아직 전쟁터"라는 생각, "지금은 그저 휴전"일 뿐이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일상은 언제나 전쟁을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군사주의는 국가주의와 맞닿아 있다. 한국사회는 과거의 역사에서 '힘을 얻어야 평화도 가능하다'는 교훈만을 되새김질 해냈다.
침략과 수탈로 굴곡된 일제강점기,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현대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 했던 피나는 노력이 뒤따랐다. 그러나 주변 강대국에 비해 국력은 여전히 약하기만 하다. 그래서 강한 힘을 끝없이 갈망한다. 거기에 비례해서 열등감은 쌓여간다. 이런 과정이 국가적인 의제 앞에 무섭도록 단결하는 힘을 낳았다. 그 힘이 전쟁과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힘의 의미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이 군사적, 경제적 약자에서 강자로 올라서면 지난 역사 속의 상처가 주는 교훈이 완성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근대국가의 역사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구 근대국가의 역사는 다양한 형태의 상비군 제도가 정착된 역사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때에 이르러 징병제가 도입됐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민 국가 형성 과정에서는 '시민의 동등한 병역의무'가 시민권을 확보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팽창한 군사주의는 국가주의와 결부되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끔찍한 결말로 이어졌다.
뒤늦게 이들 국가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는 한국은 서구 국가들의 지난 오류까지 고스란히 반복하며 따라간다. 그리고 서구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이제서야 조금씩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다.
국가주의적 욕망은 대개 인간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총동원 전시체제는 비인간적 국가모델의 극단이다. 오늘날 예비군 제도는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완성된 총동원 전시체제에서 영감을 얻은 바가 크다. 그 이야기는 한국사회가 일상적인 전쟁 준비에 짓눌리고 있는 사회란 뜻이다. 물질적인 측면은 물론 정신적인 측면까지 말이다.
예비군 제도를 다시 생각하자
참여정부가 내세운 국방개혁의 취지가 '효율'과 '국력'에 중심을 두고 있는 한 시민들은 '참여의 주체'가 아니라 '동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외 없는 병역의무 이행'과 '예비군 제도 개혁'은 군사정권이 낳은 문제의 핵심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개혁이 될 수 없다.
예비군 제도 개혁은 궁극적으로는 예비군 제도를 없애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물론 국방정책의 속성상 주변 정세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이쪽의 국방력 강화가 상대방에게 군사력 증강의 명분을 준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힘으로 주변정세를 돌파하는 게 아니라 다자적 안보체제에 기반한 평화적 관계를 구축해나갈 생각이라면 자신부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진 근대 국민 국가의 비극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물론 예비군 제도를 폐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득권 세력, 그리고 예비군 제도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반발이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별 생각없이 예비군 훈련을 받는 동안, 잊고 지낸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어려운 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군사주의, 국가주의가 팽배한 사회구조를 뜯어고치는 작업과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전쟁과 집단적 광기가 판치는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비군 제도의 목적은 군사주의, 국가주의적 가치를 훈육하는 데 있다. 예비군 훈련을 다녀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어 있다. 개인의 참다운 삶을 위해 국가 안보가 필요한 것이지, 안보를 위해 참된 삶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군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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