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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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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北村일대 역사공간 ①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가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한번씩 들려 가는 오솔길이 하나 있다고 한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철학자 헤겔이 사색에 잠겨 산책하던 길이라 해서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책로인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 것은 거기에 괴테와 헤겔의 숨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며 저마다 한번씩 괴테나 헤겔이 되어 보고, 또 괴테 작품의 주인공이라도 된듯 상상의 나래를 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즘 많이 거론되는 문화자원, 문화콘텐츠의 개발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를 얻는다. 괴테와 헤겔의 자취가 있어 평범한 오솔길이 문화적인 명소로 탈바꿈하듯이, 우리가 늘상 스쳐 지나가는 그 자리의 역사적 현장성, 문화적 공간성을 찾아내 그 의미를 담아낼 때 그 공간은 전혀 새로운 가치를 갖는 명소로 되살아난다는 사실 말이다. 이번에 우리가 답사하려 하는 북촌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북촌의 문화 좌표**

북촌(北村)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백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 남쪽 기슭, 바로 지금의 계동ㆍ재동ㆍ가회동ㆍ안국동과 길건너 경운동ㆍ관훈동ㆍ운니동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서울 도성안 북쪽에 터를 잡아 북촌이라 불리웠던 이 마을은 남향하여 양지 바르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 또한 맑아 사람이 살기좋은 명당인데다, 궁궐ㆍ관청ㆍ교육기관과 가까운 편리함도 있어 예로부터 집권 관료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었다.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는데 노론(老論)이 거기에 살고 있고, 그 남쪽을 남촌(南村)이라 부르는데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 살았다"고 적고 있듯이,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 북촌은 당대의 세도가문인 서인- 노론 집권층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사진1> 19세기 서울의 옛 지도, 수선전도 /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 정도 이래 조선조 한성부 주민들은 신분 계층과 직업에 따라 각기 주거지역을 달리하고 있었다. 북촌에는 고위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의 청진동 주변과 경복궁 서편 통의동ㆍ체부동ㆍ내자동 일대에는 관청 출퇴근의 편의를 고려하여 역관 의관 검률관 도화서원 계사(計士) 등 경아전(京衙前)들이 다수 모여 살았다.

또한 훈련원과 훈련도감 하도감이 있던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 그리고 왕십리 일대에는 군교(軍校)들이 모여 살았으며, 청계천 좌우측 오늘날의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는 시전행랑과 상인들의 가옥, 서민들의 빈약한 가옥이 밀집해 있었다.

한편 청계천 아래 목멱산(남산) 북쪽 기슭은 양지바른 곳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물 구하기가 좋아,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옥갑야화(玉匣夜話)> 속의 주인공 허생같은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이렇게 신분 계층별로 주거지를 달리 한 속에서 북촌은 당대의 권세와 부를 쥐고 흔들던 이른바 '북촌양반'들의 동네로, 조선시기 정치사의 이면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개항 전후만 해도 대원군 개혁정치의 산실이었던 운현궁이 이곳에 있었고, 갑신정변의 거사공간 또한 그 반경 안에 있었다.

이후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 조치와 더불어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고, 안국동에 양반들의 개신교회로 안동교회가 설립되고, 민중종교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중앙총부가 송현동 지금의 덕성여중 자리에 자리를 잡는 한편으로, 한성중학교 휘문학교 기호학교(중앙학교)같은 신식학교들이 들어서면서 북촌의 공간적 성격은 다소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거점으로서 북촌이 차지하는 지위와 비중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진1-2> 동쪽에서 바라본 서울의 옛 모습(모형도), 오른쪽 윗부분 백악과 응봉 사이가 북촌이다.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특히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여 청계천을 경계로 이북지역에는 조선인이, 이남지역에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게 되면서, 북촌은 서울을 가로지르는 조선인의 거리 종로의 배후지로서 3.1운동을 비롯한 각종 민족운동의 진원지 노릇을 하였다. 더불어 해방직후 치안유지와 건국준비를 위해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또한 북촌을 그 터밭으로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북촌은 개항전후 이래의 행정(行程)만 놓고 볼 때도 한국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호흡을 같이 했던 역사의 현장이자 문화공간이었던 셈이다.

이제 지하철 안국역 주변 북촌 길을 따라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곳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찾아가 보도록 하자.

<사진2> 북촌 전경, 왼편으로 헌법재판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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