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의 강혜란 소장은 현재 KBS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잘라 말했다. 시청률에 대한 PD 및 제작팀의 조급증이 몇몇 아나운서들을 '스타'로 띄웠고, 이는 보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프리랜서'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KBS의 인기 아나운서였던 강수정, 김병찬 두 아나운서가 잇따라 사표를 제출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할 것을 선언하면서 '프리랜서 아나운서' 기용에 대한 논란이 KBS 안팎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KBS를 비롯해 지상파 방송 아나운서들이 각종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를 끌면서 '아나운서들의 사회적 위상이 연예인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사회적 논란도 뜨겁다.
23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 1층에서 KBS 노동조합 아나운서 지부 및 KBS 아나운서 협회의 주최로 열린 '공영방송 진행자의 위상 정립을 위한 포럼'은 이 같은 논란들의 대안을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KBS 아나운서를 비롯한 언론학 교수 및 시민단체 활동가, PD, 기자 등 40여 명이 참여한 이날 포럼에서는 서로 간의 열띤 질의응답이 오갔다.
"끼 있는 아나운서에 대한 편애가 '프리랜서' 선언 불렀다"
KBS 강성곤 아나운서는 "오락적 끼를 갖춘 아나운서들만 연예인과의 대결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보면서 이들을 각종 프로그램의 사회자로서 중용하는 것은 자연스런 흐름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런 재기를 갖춘 아나운서들이 흔치 않은 까닭에 소수의 중복출연, 프로그램의 편중화도 두드러졌다"고 지적했다.
강성곤 아나운서는 "이른바 '프리'가 된 아나운서들은 자신의 능력만큼 대접을 안 해줘서, 조직 자체가 수구적이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개인 역량 발휘를 방해해서, 현업부담이 과중해 프로그램에 전념할 수 없어서' 떠났다고 한다"며 "그러나 조직 입장에선 이들을 훼방한 것이 아니라 편애하고 고무했기 때문에 '프리'를 선언할 만큼 성장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KBS PD협회의 양승동 회장은 "공영방송 아나운서의 정체성 위기는 구조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본다"며 "다매체·다채널·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공영방송도 자기의 존속을 위해 각종 경영효율화와 다각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공영방송도 이윤추구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논리도 방송사 안팎에서 등장했다"며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를 부추기는 연성화, 상업화에 대한 고민을 PD의 입장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또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의 전규찬 소장은 "언론, 문화연구자들이 방송진행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며 "대중의 삶과 언어,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방송진행자의 문제를 언어수행능력에 초점을 찍거나 품행의 일탈에 시비하거나 인기를 언급하는 데 그치는 계열의 논의에 미뤄버렸다"고 문화학자로서 자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진행녀' 아닌 '언론 지식인'으로서 자기 전문성 확보해야"
한편 공영방송의 아나운서들이 단순히 프로그램 진행자가 아닌 스스로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연 노력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하석필 PD협회 부회장은 "PD들이 '스타 아나운서'를 캐스팅하는 관행도 문제지만 아나운서들은 프로그램에 대한 균형을 지키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보면 아나운서들이 억지춘향 식으로 배정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나운서들이 TV 프로그램 진행을 선호하면서 스스로 공영성을 갉아먹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KBS 기자협회의 박상범 회장은 "KBS 아나운서는 어떤 보증수표가 아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24시간 뉴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제작진들도 진행자를 선발할 때 이 사람이 얼마나 유능한지에 대해 중점을 둬야 한다. 이 사람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는 고려요소가 될 수 있겠지만 결정적 요소가 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전규찬 소장은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 더 과감하고 소신있게 '지식인으로서의 방송진행자'라는 카드를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외모가 중시되는 관행 속에서 결국 '진행녀'는 된장녀와 같은 대상화된 신분으로 전락한다.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탤런트와 언어적 기능을 전담하는 직업적 전문가, 그리고 사회적 소통과 대화를 이끄는 언론 지식인, 이 세가지 길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광운대학교 김현주 교수(미디어 영상학부)는 "방송진행자는 시청자와 함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감각을 갖추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며 "신변잡기는 한 사회의 보편적인 관심이 될 수 없다"고 꼬집기도 했다.
"스스로 키운 아나운서 고비용으로 다시 쓰는 건 불난 집에 부채질"
이들은 이 같은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아나운서 스스로를 비롯한 PD, 기자, 그리고 사측의 해결노력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프리랜서'가 된 아나운서를 재고용하는 관행에 대해서는 강한 반대 의견이 연이어 제기됐다. 이미 지난 7일 KBS 아나운서 협회는 사내 게시판을 통해 "방송이 스스로 키운 아나운서를 고비용으로 다시 쓰는 행태는 재정적 위기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라며 강한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토론에 참가한 KBS의 한 기자는 "일본 공영방송인 NHK의 경우는 프리랜서로 전환한 아나운서에 대해서 3년 간 제한기간을 두고 있다"며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출신 방송사로 돌아오는 제한기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모색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전규찬 교수는 "PD 연합회와 아나운서협회, 노조 등이 함께하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이들 간의 충분히 상식적인 협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강혜란 소장은 "KBS의 경우에도 '시청률 확보', '남성은 경력, 여성은 외모'라는 공식이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 되어 왔다"며 "각종 프로그램 선발과 관련해 투명한 운영·평가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28년의 경력을 갖고 있는 KBS 이미선 아나운서는 "프라임타임(황금시간대) 쿼터제를 도입해 전략프로그램에는 내부 인력을 일정 비율 이상 쓰게 하고 MC(프로그램 진행자) 선정위원회가 공정하게 전문적인 진행자를 선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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