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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안하는 사회, 침묵 깨는 '새뚝이'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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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안하는 사회, 침묵 깨는 '새뚝이'가 필요해"

<인터뷰> 이야기 소설 발표하는 백기완 선생

입으로 소설을 빚는다. 몸짓과 눈물과 아우성, 그리고 노여움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나무 그늘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던 전통적인 이야기꾼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이야기꾼은 자취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책, TV, 인터넷 등이 이야기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특유의 쓴소리로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져 온 통일문제연구소의 백기완 선생. 그가 이번에는 이야기꾼이 돼 한바탕 이야기를 풀어내겠다고 나섰다. 그는 이미 1969년과 1970년에 '이야기 소설' 마당을 가져보려 했지만 당시 사회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번번히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12월 6일, 그는 첫 이야기 소설 '따끔한 한 잔' 창작 발표마당을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소극장 갈갈이홀에서 갖는다. 그는 왜 하필 '이야기 소설'을 택했으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일까? 20일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백기완 선생을 만났다. 손녀 뻘되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그의 말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이야기 소설이었다.<편집자>


"요즘은 죽더라도 꼭 해야 될 이야기 하는 이야기꾼 없잖아?"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프레시안

이야기 소설이란 것 자체가 강 기자 세대에는 낯설다고 했지? 그것이 바로 전통이 단절되고 메말라가고 있다는 뜻이야. 매몰되는 전통을 다시 살려볼까 해서 이야기 소설 창작마당을 가지려는 거야.

이야기 소설을 '말림'이라고도 해. 입으로 말을 하되,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거지. 옛날에는 글이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글을 몰랐다구. 알았다고 해도 한문밖에 몰랐는데 한문이 또 보통 배우기 어려운 게 아니잖아. 일반 서민들로서는 힘든 일이었어. 그래서 주로 말로 자기 뜻을 전했다고. 그것도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이야기를 뿌려가는 것이지. 이야기 소설이란 말림이라는 형식으로 꾸미는 이야기지.

그렇다면 그런 소설이 옛날에는 왜 있었냐고? 옛날에도 지금과 똑같이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었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죽이려 하는 잘못된 문명이 있잖아. 그땐 그런 일이 훨씬 많았지. 그리고 요즘에는 인터넷, 전화, 방송, 신문, 소설, 수필로 이야기를 표현하지만 옛날에는 말과 행동으로 이야기를 표현했거든. 꼭 말해야 하는 이야기만 소설처럼 꾸며서 듣는 사람한테 이야기했어. 이번 이야기 소설도 그런 거야. 잡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소설을 꾸며대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될 이야기를 갖고 꾸며내는 소설!

그런데 왜 그런 아름다운 문학의 형식, 예술의 형식이 없어졌을까? 거기엔 네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 말림으로 꾸며지던 이야기가 글이 보편화되면서 변혁기를 맞았지. 말림이라는 소설 형식이 조금씩 퇴색돼 간거야.

둘째로는 꼭 해야 될 이야기는 권력자들이 싫어하거든. 자기들 욕하는 게 막 나오면 안되니까 권력자들이 말림을 못하게 한 거야. 이야기투의 소설을 꾸며서 얘기하고 듣다 보면 정말 큰 문제가 생긴다. 꼭 해야 될 얘기, 하지 않으면 못 배길 얘기만 하다보니까 얘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부담이 오고, 더군다나 옛날에 백성들을 지배하는 계층들이 보자면 이거 못쓰겠거든.

셋째로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바뀌었어. 예전에는 이야기꾼이 목숨을 걸었어. 이야기 소설이라는 예술의 형식, 그리고 꼭 해야 하는 이야기 내용에 목숨을 걸었다는 거야. 그런데 세월이 자꾸 가면서 사람들이 점점 기회주의적으로 나갔지. 위험해지지 않을 만큼만 슬쩍 얘기하는 거야. 요새 신문기자들 좀 봐. 그러니까 '말꾼'이 바뀐거지. 이제 우리 사회의 말꾼은 지식인이 돼 버렸어.

그리고 하나 더. 글로 소설을 표현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장악하게 됐지. 이야기를 말로 하면 듣는 사람 마음에만 남는데, 글은 쓴 사람의 것이 되는거야. 이 같은 사적 소유개념이 이야기 소설이 퇴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어.

"자본주의가 한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리는지 보여줄게"

그렇다면 내가 이제 하려 하는 이야기 소설의 복원이 무슨 뜻을 가지냐고?

아주 없어져 가는 우리 전통, 이런 것이 있었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 그리고 더 나아가 진짜 이야기 소설이 담고 있던 예술적 측면까지도 알릴 수 있었으면 해. 이야기 소설은 참된 인간의 목숨같은 이야기를, 생명의 얘기를 했지. 그랬던 문학의 생명을 되살리지 않으면 인간이 죽을 뿐 아니라 인간의 예술이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창조적으로 이야기 소설을 해보려 하는 거야.

대체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하겠지? 우리나라도 근대 이래로 좋은 소설이 많지만 내가 보기엔 현대 문명,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착한 사람 한 명을 어디까지 괴롭히느냐, 어디까지 쭉정이로 만드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삶 속에서 끄집어낸 소설은 없더라고. 이왕 전통을 되살리는 마당에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한 인간을 어디까지 괴롭히느냐는 이야기를 소재로 담았다는 말이야.

제목이 '따끔한 한잔'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굉장히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풍자야. 배 곪아봤어? 십 년 이상 굶으면 몸에는 절대적인 영양분이 없을 뿐 아니라 기운도 없어. 그러면 이상하게 몸에서 열이 나거든. 그때 보통 사람들은 따끈한 미역국에 흰 쌀밥, 거기에 김치를 얹어서 먹고 싶어. 그런데 더 많이 이십, 삼십 년을 내리 굶으면? 이상한 게 '따끔한 한잔'을 먹고 싶게 되는 거야. 40도짜리 소주 마셔봐. 정신 번쩍 나고 배고픈 게 딱 없어지거든. 그래서 따끈한, 아니 따끔한 한잔이지. 둘 다 될 수 있어.

그러면 '따끔한 한잔'의 내용이 뭐냐고 물어볼 거 아냐? 조금만 얘기해줄게.

한 착한 사람이,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게 피해를 받아가다가 쭉정이만 남았어. 가랑잎보다도 더 참혹하게 마지막을 떨구고 있는 풀잎을 쭉정이라고 해. 그런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렸어.

너무 착해서 이놈 저놈에게 이용만 당하던 이 사람이 생의 마지막에는 집도 없고, 피붙이도 없고, 홀로 전국 골골마다 다니면서 따끔한 한잔을 먹으러 다니거든. 그러다가 하루는 삼태기로 쏟아붓는 것처럼 눈이 펄펄 내리는 저녁 눈 속에 쓰러져. 평생 고생만 하다 보니까 나이 칠십 넘은 이 사람이 눈 속에 파묻혔는데 일어날 수가 없어.

이름이 '어진'인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별나라 공부 하겠다는 꿈이 있었어. 어진이가 어린 시절에 배고파 울 때 '할머니, 배고파, 저 별 좀 따줘'라고 하니까 할머니가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따먹으면 되냐, 이담에 커서 달구지 하나 만들어서 떡 잔뜩 싣고 배고픈 별나라 동무들과 어울려서 잘 살아야지'라고 했거든. 어진이가 '어떻게 하늘에 올라가는 달구지에 올라가'라고 물으니까 할머니가 '그런 달구지를 만들면 되지' 한거야. 깜짝 놀란 어진이는 나중에 저기 올라가는 달구지 만들어서 떡 잔뜩 싣고 가야겠다고 결심한 거지.

결국 산에 올라가려던 늙은 어진이는 힘이 없어서 못 일어났어. 그렇게 쓰러져 죽었는데 팔뚝만 하나 올라와서 꽁꽁 얼었어. 거기에 공책 하나가 쥐어져 있는데 공책이 팔락팔락 거려. 그러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그 공책에 적힌 '따끔한 한잔'이란 시를 보게 돼…

"죽은 늪을 깨우는 방법? 돌멩이 하나 던지는 거야"

오늘의 소설에도 이야기 소설과 같은 정신이 담겼으면 좋겠어. 시도 마찬가지고. 꼭 해야 될, 목숨 걸고 해야 될 이야기가 담겨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이번 이야기 소설은 '새뚝이'야. 그림을 매일 보면 지겨워지는 것 같은 상태를 '미적 패착 상태'라고 해. 그런데 어떤 그림에는 볼수록 새로워지는 한 구석이 있거든. 그것을 새뚝이라 그래. 침묵까지 삼키는 썩은 늪, 죽음을 깨우는 방법은 요만한 돌멩이를 하나 던지는 거야. 그럼 '퐁당'하고 깨지잖아. 그 '미적 질곡', 죽음을 깨트리는 돌멩이 하나, 그것이 내는 소리를 새뚝이라고 해. 그냥 평범한 소설을 입으로 창작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예술계 혹은 정신계의 미적 질곡을 깨트리는 새뚝이가 되겠다는 얘기지. 정신 좀 나게.

그렇다고 사람들을 깨우치게 만들자는 뜻이 아냐. 깨우치자고 하는 것은 웅변이고 설교지. 이 소설만 보면 주인공이 자꾸 바보처럼 행동해서 자꾸 안타까워. 주인공은 '내가 인간적으로 모자라고, 돌아올 길목을 내가 막았기 때문에 그러지 않냐'고 하면서 반성은 안하고 혼자서 넋두리를 하거든. 불평이 없어. 듣는 사람이 느끼게 하자는 것이지. 그래서 이번 이야기 소설은 새로운 '느낌표'를 남기는 작업 아니겠나 생각해. 새뚝이로 미적 질곡도 깨트리면서 느낌을 주자는 거야.

"이 이야기 답답한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어"

그럼 이걸 누가 들었음 좋겠냐고?

답답한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어. 추위 닥쳐오는데 길거리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노점상인들이잖아. 얼마나 답답해. 내일이라는 게 없잖아. 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래서 일부러 초청했어. 두번째는 쫓겨난 빠른 기차(KTX) 승무원들. 서울역에서 1년째 고생하다보니 얼굴들이 다 이상해졌어. 가슴이 아파. 그래서 내가 해줄 게 뭐가 있어. 이야기소설 하는 마당에 와서 좀 들어보라고 초청했어.

정말로 소박한 시민들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이번에 못 듣는 사람들 위해서 별도로 기회를 만들어 나에게 이야기 소설 꾸며달라고 해도 좋고. 그 대신 내가 절대로 이 소설에 대해 세워논 원칙은 '사기꾼'들은 들어선 안된다는 거야. 누가 사기꾼이게? 바로 60년 동안 몽땅 거짓말만 했던 정치꾼들이야. 나머지들은 누구라도 좋아.
오는 6일 열리는 백기완 선생의 창작 발표마당 참가문의는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02-762-0017)을 통해 할 수 있다. 연구소 측은 "이미 초청된 노점상인들과 농성 중인 KTX 여승무원들이 있어 앉을 또아리(좌석)가 부족할 것 같다"며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고 귀띔했다. 입장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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