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 중뿔 난 짓만 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 남들이 흔히 하는 독립운동사를 외면한 채 침략사와 친일사에만 매달리고 있다. (…)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의도적 은폐와 무관심에 묻힌 금단의 구역이었던 친일 행적 발굴을 파헤치는 데 평생을 보낸 고(故) 임종국(1929-1989)의 말이다.
그가 개척한 일은 음지에서만 음미되다가 노무현 정권 출범과 더불어 추진된 '과거사 청산'의 밑거름이 되어 부활하고 있다.
그의 사망 17주기인 11월12일에 맞춰 임종국의 업적과 일생을 되짚는 평론집 <임종국 평론>(정운현 지음. 시대의 창 펴냄)이 출간됐다. 저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정운현 씨. 그 역시 임종국의 뜻을 계승한 제자 중 한 명이다.
정 씨는 서문을 통해 "1990년 100매 분량으로 그의 약전을 1차로 썼고, 8년 뒤에 다시 그를 200매 분량으로 소개했다. 다시 8년 뒤에 제대로 된 평전을 내놓게 됐다. 해묵은 숙제를 겨우 마친 기분이다"라며 감회를 밝혔다.
저자는 임종국의 직계 가족 모두를 직접 만나고 대학 선후배, 문학인 등 20여 명의 주변인물을 밀착 취재했다.
그러고도 "나는 겨우 시간을 내고 다리품만 팔았을 뿐이다. 그가 쓴 책도 많고 글도 많아 참고할 자료도 넉넉했다. 모든 걸 발품을 팔아 손수 베껴야 했던 그와는 딴판인 환경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저자는 제1부 '잘못 끼워진 첫단추', 제2부 '문학도의 꿈', 제3부 '갈등 속의 집념', 제4부 '끝내 이루지 못한 꿈' 등 4장으로 나눠 임종국의 궤적을 탐색했다.
제1부에서는 판검사를 꿈꿨으나 등록금이 없어 좌절을 맛봐야 했던 청년 임종국을 그렸다. 이 시절의 이야기에는 저자가 발품을 팔아 얻은 정보들로 넘쳐난다. 농업학교 진학과 경찰관 근무, 학교 성적 공개 등 다양한 일화를 소개한다.
제2부는 '이상 연구'에 몰두하며 문인의 꿈을 키우던 시기의 이야기다. 저자는 이 시기에 임종국이 남긴 미발표 유고시 몇 편을 발굴해 책에 실었다.
임종국을 친일연구의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은 '친일문학론'은 제3부에서 소개한다.
'친일문학론'은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친일 행적을 파헤친 작품. 민족문화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친일문학 연구는 임종국 선생이 한 거기(친일문학론)에서 한 발자국도 앞서지 못했다"고 고백할 정도의 역작이다.
'친일문학론'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친일파와 그 후손에게는 입맛이 쓴 연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임종국은 단 한번도 협박에 시달리거나 송사에 휘말린 적이 없다. 철저한 조사와 자료의 힘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저자는 친일파의 후손이 증거자료를 보여달라고 임종국을 찾아왔던 일화를 소개한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임종국이 내보인 증거자료 한 꾸러미를 보더니 말없이 물러났다고 한다.
저자는 임종국의 업적을 열거하거나 칭송만 늘어놓지 않았다. 앞서 출간된 대다수의 평전들이 '전(傳)'은 넘쳐나는데 비해 평(評)은 부족하다고 생각해온 터였기 때문이라고.
먼저 '친일문학론'의 오류를 꼬집는다. 오상순과 이병기를 '끝까지 지조를 지킨 작가'로 언급했는데 둘의 친일 행적이 후일 밝혀졌던 것. 저자는 임종국이 생전에 오상순의 친일을 파악하고도 '영광된 작가'에서 그 이름을 빼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또 조선사연구회장 미야타 여사에게 편지를 보내 "'책에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어쩔 수 없었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다"며 "선생이 살아 있다면 토론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제4부에서는 천안의 '요산재'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던 시기와 그의 사후 친일파 청산 문제와 관련된 각종 쟁점을 소개한다.
감방에서 친일문학론 보급에 앞장선 재야 정치인 백기완의 이야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이에 민족지 논란이 일자 두 신문의 기자가 앞다퉈 임종국을 찾아왔다는 사실 등 재미있는 일화가 실렸다.
저자는 임종국의 사망 17주기인 11월12일 천안에 있는 그의 묘소에 이 책을 바쳤다. 그 뒤에는 50여 명의 '사후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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