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아들 ⓒ프레시안무비 | |
<장군의 아들> 1편의 음성해설은 장면별로 구체적으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한국영화사와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설명하는 데 치중해 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전부 신인배우를 캐스팅해 촬영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못해서)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하는 한편, 김두한이라는 실존 인물을 다루면서 일제 강점 하라는 특정한 시대적 배경에 국한시킨 이유, 그리고 도올 김용옥 선생이 <장군의 아들>에 기여한 바 등을 자세히 설명한다. 하지만 영화 외적인 면에서 볼 때 <장군의 아들>의 의의는 할리우드 외화 직배 투쟁에 맞서 한국영화계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당시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화로 자리매김했다는 데 있다. 1편에 서플먼트로 수록된 약 13분 분량의 60만 관객 돌파 기념행사 영상물을 보면 더욱 감회가 깊어진다. 서울 종로의 단성사 앞에서 풍물패의 축하 공연과 더불어 60만 번째 입장 관객에게 각종 선물을 전달하는 장면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천하의 소인배들 앞에 우뚝 섰던 자유인'이라는 카피가 쓰여 있는 <장군의 아들> 간판이 당시 개봉을 앞두고 있던 <다이하드 2>의 간판과 대조적으로 보여지는 한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축사도 들을 수 있는 흥미로운 영상물이다.
장군의 아들 2 ⓒ프레시안무비 | |
<장군의 아들 2>(1991)와 <장군의 아들 3>(1992)는 당시 연출부였던 김홍준 감독이 함께 진행한다. 김홍준 감독은 이 두 편의 음성해설에서 우선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부터 짚고 나간다. <장군의 아들 2>가 개봉한 1991년은 문화부가 처음으로 지정한 '연극영화의 해'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최고 흥행작은 <사랑과 영혼>(120만)이었지만, 한국영화 중에서는 <장군의 아들 2>(36만 명)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임권택 감독은 "<장군의 아들> 2편을 만든다면 당시 김영빈 조감독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준비를 시켰다"고 한 뒤, "한데 이태원 사장이 그건 1편을 본 관객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전혀 연출할 생각이 없었는데 2편을 맡게 되었고, 그 바람에 김영빈 감독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고 덧붙인다. 2편의 음성해설은 1편보다 좀더 영화 속 각 장면에 밀착돼 있고 더욱 다채로운 일화가 소개된다. 특히 임권택 감독이 극중 한 대목에서 운전기사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는 장면이 있는데, 음성해설이 아니었더라면 미처 알지 못했을 부분이라 더욱 흥미롭다.
장군의 아들 3 ⓒ프레시안무비 | |
<장군의 아들 3> 음성해설 역시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된다. 1992년은 충무로에 대기업 자본이 처음 들어왔던 때이고, 이와 더불어 기획영화가 처음 시도되었던 중요한 해다. "<장군의 아들 3>은 충무로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 각색을 맡았던 김홍준 감독의 설명이다. 특히 이 3편은 원작에서 적용할 만한 이야기가 없는 상황에서 시나리오를 완전히 창작해야 했고, 따라서 매일매일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촬영해야 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임권택 감독은 3편까지 연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후 <태백산맥>을 통해 진지한 작업을 하기 위해 제작사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장군의 아들 3>은 임권택 감독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디딤돌 같은 작품이었다는 얘기다. 음성해설을 다 듣고 나면, <장군의 아들> 시리즈는 임권택 액션영화의 부활을 알린 작품이라기보다는, 한국영화의 산업화 단계에서 더욱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장군의 아들>이야말로 한국영화가 직배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맞서서 충분히 상업적 성공의 잠재력이 있음을 입증해보인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은 1편의 말미에서 "<장군의 아들>은 관객들에게 오락적인 면에서 스트레스 해소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흥행에 성공해) 후에 내가 <서편제><태백산맥><축제> 등의 영화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3편의 마지막에서는 "왜 1편은 흥행이 잘 되었는데 관객 숫자가 점점 떨어졌는가를 생각해보면, 3편은 너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1편은 김두한이 밑바닥에서 시작해 종로 깡패의 두목이 되기까지의 성취감과 성공담이 있는 반면, 2편과 3편은 그런 게 없어서 영화를 보는 이가 적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인다. 진정으로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흥행에 성공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바로 영화감독의 숙명이자 딜레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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