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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그의 죽음으로 묻혀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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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규하, 그의 죽음으로 묻혀진 '진실'

신군부의 '권력찬탈 과정' 함구한 채 타계

최규하 전 대통령이 끝내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1979년 12.12 사태와 이듬해 벌어진 광주 5.18 민주항쟁의 진상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세상에 밝히지 않은 채 22일 세상을 떴다. 대통령 재임 기간이 10개월로 짧았음에도 그 기간에 벌어진 헌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일들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사라진 셈이다.
  
  군사쿠데타 방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살해된 1979년 10.26 사태 직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사이의 권력갈등이 깊어갔다.
  
  결국 그 해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정 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아서 10.26 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구실을 만들어 정 총장을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강제연행했다. 서울시내 한 복판에서 총격전을 동반한 군부의 하극상이 전개됐다. 이것이 12.12 사태라고 불리는 군사쿠데타다.
  
  이 가파른 굴곡점에 최 전 대통령이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정 총장 강제연행은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최 전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신군부는 사후승인이라도 받기 위해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최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했다.
  
  결국 최 전 대통령은 12월 13일 새벽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날 아침 노재현 국방장관이 밝힌 정 총장 연행 사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훗날 대법원은 "신군부 세력의 주장대로 최 대통령이 재가를 했다 해도, 이는 정 총장이 이미 체포됐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뤄진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신군부를 단죄했다.
  
  또한 훗날의 역사적 평가는 최 전 대통령이 신군부의 정 참모총장 강제연행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신군부의 12.12 쿠데타를 사실상 방조한 책임을 용서하지 않았다. 10.26 이후 최 전 대통령이 과도정부를 맡은 뒤 집권욕에 사로잡혀 민주화를 지연시키다가 신군부 세력에게 기회를 내줬다는 혹독한 평가도 나왔고, 민주화운동 관련단체들은 내란방조 혐의로 최 전 대통령을 고발하기도 했다.
  
  5.18 때 무얼 했나?…왜 하야했나?
  
  최 전 대통령은 12.12 직후인 같은 달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권은 이미 신군부에 넘어간 상황이었으나, 최 전 대통령은 개헌 일정과 1981년 정권이양 등의 정치일정을 제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지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1980년 2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시국관련자 687명을 사면복권하는 전향적 조치도 취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는 12.12 쿠데타를 군사독재의 연장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결국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등 과잉진압에 나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러나 당시 최 전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공식 기록이 없다. 비상계엄이 확대된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닷새 간 최 전 대통령이 어떤 행사에 참석했거나 접견한 의전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최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사실상 연금상태에 있었음을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최 전 대통령의 역할과 관련해 남는 또 다른 의문점은 5.18 이후 극도의 혼미상태에 빠져든 정국 속에서 8월 16일에 그가 돌연 하야하게 된 과정이다. 최 전 대통령은 하야 성명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한 정치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사실상 신군부 지지를 선언했다.
  
  최 전 대통령이 하야하게 된 배경을 스스로 밝힌 적은 없지만, 지난 1995년 12.12 및 5.18 사건 수사 당시 전두환 씨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검찰은 두 가지 갈래로 이를 정리했다. 신군부 측이 5.18 이후 국회를 해산하고 국보위를 설치함으로써 내각의 기능이 상실된데다, 최 전 대통령에 대한 군 원로들의 하야 설득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신군부는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 등을 최 대통령에게 수 차례 밀사로 보내 하야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현확 당시 총리도 이런 사실을 들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그 과정에서 최 전 대통령은 처음에는 하야를 거부했으나 수 차례에 걸친 신군부의 회유와 압박에 못 이겨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당초 8월 15일에 하야하려 했으나 신군부가 "광복절에 사임하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고 말려 하루 늦췄다는 후문도 있다.
  
  두 번의 증언 기회 있었다
  
  최 전 대통령에게는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리고 자신의 하야로 이어지는 신군부의 권력찬탈 과정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인 1987년 5.18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첫 번째 기회였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진행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과 재판 과정이 두 번째 기회였다.
  
  특히 지난 1995년 있었던 12.12 및 5.18 사건 수사 당시 최 전 대통령의 태도는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은 법정에 강제구인됐지만 증인선서 및 관련 증언을 모두 거부했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증명하거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정작 신군부의 압력에 맞서 고집을 부려야 할 때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엉뚱한 시점에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혹평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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