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필름포럼에서 단관개봉한 숀 펜 주연의 영화 <대통령을 죽여라>는 그 내용이 갖고 있는 정치적 폭발성, 사회적 의미 등으로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단 1개관에서 개봉되는데다 흥행성이 극히 미약한 작품이지만 우리사회와 우리사회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환경을 여러 측면에서 암시,은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프레시안무비가 세명의 필자를 동원, 이 작품을 낱낱이 해부,소개하려는 건 그때문이다. - 편집자 |
지난 10월 13일 서울 필름포럼 극장에서 갑작스레 개봉한 <대통령을 죽여라>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영화다. 닐스 뮬러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는 우리가 이미 <21그램>에서 만났던 숀 펜과 나오미 왓츠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다. 또한 <호텔 르완다>의 돈 치들과 호주 출신의 저력 있는 배우 잭 톰슨이 조연으로 분하고 있다. 캐스팅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 영화는 스탭들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위대한 유산><이투맘마>의 알폰소 쿠아론이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슬리피 할로우><알리>의 명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도 합류했다. 위의 유명 영화인들이 이 무명 신인감독의 영화에 힘을 보탠 이유는 물론 시나리오의 완성도 때문이다. <대통령을 죽여라>는 1974년 볼티모어 워싱턴 공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한 평범한 남자가 델타 항공 523편을 납치해서 백악관으로 가려다가 사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남자의 목적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을 암살하는 것. 베트남 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어 재선에 당선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기 불과 6개월 전에 발생했던 일이다. 대체 이 남자는 왜 닉슨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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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죽여라 ⓒ프레시안무비 |
닉슨이 미국에 남긴 트라우마 영화는 명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닉슨 암살 계획을 알리는 주인공 샘 빅(숀 펜)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의 제2악장이 애틋하게 흐르는 가운데, 샘 빅은 번스타인의 음악이야말로 "순수하고 정직해서"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려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1년 전으로 플래시백 해서 그가 왜 이런 대담한 일을 구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샘 빅은 사무용 가구점 세일즈맨이다. 사회생활에 적응을 잘 못해온 소심한 사내인 샘의 인간관계는 과히 좋지 않다. 그는 이혼한 아내 마리 빅(나오미 왓츠)과의 재결합을 원하지만, 두 딸을 맡아 기르고 있는 마리는 냉담하기만 하다. 가구점 사장은 샘에게 최고의 세일즈맨이 될 것을 요구하며 혹독하게 부린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에 괴로워하는 그는 카센터에서 일하는 흑인 친구 보니(돈 치들)와 사업을 하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사업자금을 조달하지도 못하고 소원했던 형과도 등을 돌리게 된다. 궁지에 내몰린 샘은 밤마다 TV를 보며 홀로 외로움을 달래지만, 아무도 그의 편이 돼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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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죽여라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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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지배하는 중심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TV를 통해 보여지는 리처드 닉슨의 얼굴이다. 거실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닉슨은 특유의 표정으로 연설문을 읽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약속한다. 하지만 1960년대 말을 통과한 미국 사회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닉슨 독트린 선언으로 미군은 1973년 베트남 전쟁에서 완전히 철수했지만, 그 전쟁은 이미 미국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남긴 뒤였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무역수지 적자 등으로 미국의 경제력은 날로 약화되었으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대통령을 죽여라>는 바로 닉슨 대통령 재임 말기, 큰 위기에 봉착했던 미국의 사회 경제적 '시스템'이 어떻게 한 평범한 남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초, 혁명이 기운이 일었던 그 때 극중 인용되는 TV 화면들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미국 인디언 운동(American Indian Movement)을 이끌었던 액티비스트이자 영화배우 러셀 민즈(<라스트 모히칸><내추럴 본 킬러>), 좌파 흑인운동 단체였던 블랙 팬더당(Black Panther Party)의 대표 데이비드 힐리어드 등의 실제 인터뷰 클립이 삽입돼 있다. 극중 한 장면에서 샘 빅은 "합법적인 방식으로 흑인들의 비참함을 호소할 방법은 없다"며 체제 전복을 선언하는 데이비드 힐리어드의 모습을 보고 직접 블랙 팬더당에 찾아간다. 백인이 사무실에 찾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당원에게 샘 빅은 말한다. "나는 백인이지만 당신들의 대의에 동의한다. 지금 체제는 옳지 않다. 내가 참여함으로써 블랙 팬더는 얼룩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돈에 쪼들리는 그가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다"며 푼돈을 꺼내 당비로 제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다. 그렇지만 샘 빅은 적극적인 액티비스트가 되지는 못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아메리칸 드림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노예처럼 복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흑인 친구의 고장난 버스를 이용해 이동식 타이어 가게를 차리려 한다. 하지만 그의 꿈은 (파트너가 흑인이라는 암묵적인 이유로) 대출 신청을 거부당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법원으로부터 아내와의 재결합 불가를 통보 받고, 가구점에서도 일자리를 잃고, 방세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차 불면증에 시달린다. 1974년 2월, 샘은 미군 일병 로버트 프레스턴이 군 헬리콥터를 훔쳐 백악관 위를 맴돌다 격추된 사건을 뉴스에서 본 뒤 결심한다. 이런 비참한 시스템을 만들어낸 리처드 닉슨을 암살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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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죽여라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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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죽여라>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숀 펜의 연기다. 소심해 보이는 눈빛과 머뭇거리는 입술, 곤혹스러운 표정과 깊은 주름을 간직한 숀 펜의 얼굴은 이 영화 최대의 스펙터클이다. 그는 체제의 모순으로 작은 꿈조차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외롭고 고독한 샘 빅을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미국 평단은 당시 그의 연기에 대해 "숀 펜은 <미스틱 리버>로 올해 오스카를 거머쥐었지만, 사실 <대통령을 죽여라>로 받았어야 옳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숀 펜의 호연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이다.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복고적인 색감은 물론, 정교하게 세팅한 조명으로 숀 펜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탁월하게 포착해낸다. <21 그램>보다는 비중이 적은 편이지만 내면 연기를 성숙하게 해낸 나오미 왓츠, 그리고 역시 체제에 희생당한 사회적 약자로서 흑인 노동자를 연기한 돈 치들의 호흡도 좋다.
여전히 울림이 큰 정치적 코멘트 <대통령을 죽여라>가 미국 주류 영화계에서 큰 환영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국가적 안위를 염려하는 보수적인 관객과 평자들에게, 상당히 급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이 영화는 다소 불온하게 보였던 탓이다. 물론 양심적인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저돌성과 배우들의 호연에 찬사를 보냈다. 마치 9.11 테러사건 당시 비행기를 탈취한 테러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샘 빅의 행동이 의미심장하게 읽혔던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은 지금도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소 과장하자면 닉슨 독트린은 미국의 이라크 파병과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닉슨 재임 당시 미국의 경제난과 지금 노무현 정권 하의 경제 불안과 부동산 가격 상승을 연결시킬 수도 있다. 어쨌든 <대통령을 죽여라>는 올 초 개봉했던 <굿 나잇 앤 굿 럭><시리아나> 등과 더불어 미국 영화계가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할리우드 내부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힘은 더욱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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