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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거, 몽리자, 소수관…' 무슨 뜻인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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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구거, 몽리자, 소수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선병렬 의원 "사법개혁 이전에 '법률용어 한글화'부터"

"(用水權의 承繼) 農, 工業의 經營에 利用하는 水路 其他 工作物의 所有者나 蒙利者의 特別承繼人은 그 用水에 關한 前所有者나 蒙利者의 權利義務를 承繼한다."
  
  민법 제233조의 내용이다. 법조인이 아닌 사람 중 몇 명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많지 않을 것이다. 위 문장의 한자어를 모두 한글로 바꿔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용수권의 승계) 농, 공업의 경영에 이용하는 수로 기타 공작물의 소유자나 몽리자의 특별승계인은 그 용수에 관한 전소유자나 몽리자의 권리의무를 승계한다."
  
  일단 '몽리자'라는 낯선 표현에서 막힌다. 이익(利)을 입는(蒙, 입을 몽) 자?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사전은 '몽리자'를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래도 정확한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법률전문가들은 이 경우 몽리자라는 낱말이 '이익을 위해 물을 이용해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설명한다.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접한 뒤에야 민법 제233조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현행 법률용어 가운데는 이처럼 낯선 일본식 한자어가 종종 섞여 있다. 앞서 예로 든 물 사용에 관한 권리를 다룬 민법 조항의 다른 문구들만 살펴봐도 구거(溝渠, 도랑), 소수관(疏水管, 송수관) 등 어색한 표현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용어 한글화한 민법 개정안, 올해 안에 발의
  
  이런 용어들을 쉬운 한글로 바꾼 민법 개정안이 올해 안에 국회에 발의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열린우리당 선병렬 의원은 8일 영등포 중앙당사에서 브리핑을 통해 "일본식 한자로 이뤄진 민법의 용어와 문장을 우리말로 순화한 개정안을 마련해 연말에 발의할 예정"이라며 "당초 한글날에 맞춰 발의할 예정이었으나 민법의 방대한 분량 때문에 다소 지연됐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마련된 개정안을 보면 현행 민법의 "詐術(사술)로써 能力子(능력자)로 믿게 한 때에는"이라는 표현은 "속임수를 써서 상대방이 무능력자 자신을 능력자인 것으로 믿게 하였을 때에는"으로 바뀌고, "完濟(완제)하지 못하게 된 때에는"은 "모두 변제하지 못하게 된 경우에는"으로 바뀐다.
  
  또 '表意子(표의자)'는 '의사표시자'로, '通情(통정)한 虛僞(허위)의'는 '서로 합의한 뒤 허위로 한'으로, '忍容(인용)할 의무'는 '참고 받아들일 의무'로, '疏水管(소수관)'은 '송수관'으로, '溝渠(구거)'는 '도랑'으로, '朽廢(후폐)한 때에는'은 '너무 낡아서 쓸모 없게 되었을 때에는' 등으로 각각 바뀐다.
  
  이밖에도 '口授(구수: 말로 전함)', '俱存(구존: 모두 살아있음)', '嚴封捺印(엄봉날인: 단단히 봉하여 날인함)', '辨識(변식: 판단하여 앎)' 등도 고쳐야 할 표현으로 지적됐다.
  
  국립국어원 "현행 민법 조문 60%는 일본 민법을 직역한 문장"
  
  현행 법조문이 일본식 한자어와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국립국어원은 지난 2004년 초 현행 민법의 조문을 검토한 결과 "1958년 제정 당시 일본 민법을 직역하다시피 한 부분이 60% 이상 그대로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법률 조문에 일본식 한자어뿐 아니라 일본어 투의 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함에 있어서', '~로서의', '~조 내지(乃至) ~조' 등이 일본어 투의 표현에 해당한다. 국립국어원은 이런 표현들을 각각 '~하면서', '~이 되는', '~조부터 ~조까지'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심지어 문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문장이 법률 조문에 포함된 경우도 종종 있다. '~에 갈음한', '~에 불구(不拘)하고'등의 표현이 여기에 속한다. '~을 대신한', '~에도' 등으로 쓰는 게 옳다.
  
  국립국어원은 2004년 1월 이런 내용을 담아 '쉽게 고쳐 쓴 우리 민법'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선 의원이 마련 중인 민법 개정안도 이 보고서를 참조한 것이다.
  
  선 의원은 "민법은 사법(私法)의 기본법으로서 많은 특별법의 기초가 되고 있으나, 어려운 한자나 잘못된 일본식 용어와 문장이 너무 많아서 법률 수요자인 국민은 해독하는 것조차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번 개정안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선 의원은 이어서 "최근 사법 개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법원이 판결문을 쉽게 쓰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법조인과 비법조인 사이의 거리를 좁히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 역시 법조문 자체가 쉬운 표현으로 바뀌지 않으면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법률 한글화 추진할 국어 전문가가 없다…"판결문도 결국 읽기 위한 것"
  
  하지만 선 의원이 추진하는 법률용어 한글화 작업이 성공하려면 만만치 않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우선 이런 작업을 추진할 전문인력이 부족하다.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의원과 전문위원을 통틀어 국어 전문가는 한 명도 없다. 입법 지원실무를 담당하는 국회 법제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법제실에 현재 44명의 법제관이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법학 및 사회과학 전공자들이다.
  
  법조인들은 법률용어 한글화 작업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문구 해석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어 전문가와 법률 전문가의 협동작업이 절실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법률용어를 보다 쉬운 한글 표현으로 바꾸는 작업은 외면하기 힘든 흐름이 되고 있다. 기존의 난해한 법률용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사법부 밖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원범 대구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3월 <법률신문>에 기고한 '민사판결서 작성방식의 현황과 개선방향'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기존의 판결문에서 자주 사용하는 법률용어가 대부분 일본식 한자어로 돼 있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며, 법률용어를 일상에서 자주 쓰는 한글 표현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이 부장판사는 이 글에서 "판결문도 결국 읽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의 병력'을 굳이 '기왕증'이라는 어색한 단어로 표현하는 관행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현직 판사의 이런 지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법개혁 논의 무르익은 지금, '법률용어 한글화' 추진해야"
  
  실제로 이런 낯선 법률 문장에 적응하는 과정은 법과대학 신입생들이 가장 먼저 호소하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선병렬 의원은 "젊은이들이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한글세대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일본식 한자어와 한글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에 억지로 적응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는 게 안타깝다는 지적이다.
  
  선 의원은 "실무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최근 사법부 안팎에서 기존의 법률용어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만큼 법률용어 한글화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민법 한글화에 이어 상법, 형법 등 8대 주요 법률의 한글화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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